2026년 5월 24일 일요일

2026년, 식품 안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RM Magazine, 2026년 5월 20일 | David Ruppel · Benjamin Peetz (Westfield Insurance)


식품 안전은 오랫동안 '기준을 지키는 문제'로 여겨져 왔다. HACCP을 갖추고, 감사를 통과하고, 인증서를 받으면 충분하다는 인식이 업계 전반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Westfield Insurance의 농업 리스크 전문가 David Ruppel과 Benjamin Peetz가 RM Magazine에 기고한 이 글은, 그 인식이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지적한다. 2026년 식품 안전 리스크는 단일한 위협이 아니라, 규제·기술·환경·보험이 복합적으로 얽힌 다층적 문제로 진화하고 있다.

규제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2024년 FDA는 인간 식품 프로그램(Human Foods Program, HFP)을 출범시키며 조직을 통합했다. 식중독 예방, 만성질환 감소, 화학물질 안전 확보를 목표로 한 이 개편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운영 방식에 있다. FDA는 현장 점검 권한을 점차 주 정부에 위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연방 단위의 일원화된 규제 대응만으로는 부족해졌다는 뜻이다. 같은 기업이라도 사업장이 어느 주에 있느냐에 따라 감시 강도와 점검 방식이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기업의 규제 대응 전략을 근본적으로 복잡하게 만든다.

더불어 기사는 기준 준수 자체의 한계도 직시한다. 이제 업계에서 규정을 단순히 충족하는 것은 최소 요건에 불과하다. 기준을 초과 달성하는 것이 표준적 기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OP를 철저히 이행하고 감사를 통과한 시설에서조차 리스테리아가 완제품에서 검출된 사례가 있다. 병원균은 잠복하고, 검출을 회피한다. 이 불편한 사실은 규정 준수(Compliance)와 실질적 위험 통제(Risk Control)가 같은 개념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서류상 완벽한 관리 체계가 실제 사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이 기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인식이다.

현장이 닫히고, 새로운 오염원이 열린다

팬데믹 이후 농식품 시설의 생물보안 기준이 전반적으로 강화되었다. 외부 인력의 접근이 제한되고, 방문을 위한 승인 절차가 복잡해졌다. 리스크 컨트롤 전문가가 현장을 직접 점검하기까지의 리드타임이 길어지고, 일부 경우에는 가상 점검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역설적이다. 위험을 막기 위한 보안 강화가, 위험을 점검하는 행위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사는 PFAS(과불화화합물)를 새로운 차원의 위협으로 다룬다.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리는 PFAS는 환경에서 분해되지 않고 잔류하며, 오염된 지하수를 통해 낙농장 우유까지 침투한 실제 사례가 보고되었다. 문제는 이 위험이 보험 사각지대에도 놓여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보험사는 PFAS 관련 위험을 일반 책임보험에서 제외하고 있다. 오염 책임 보험(Pollution Liability)을 별도로 가입하지 않은 기업은 이 리스크에 무방비 상태일 수 있다. 위험의 실체는 알려졌지만, 그 위험을 전가할 수단이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기술은 방패인가, 새로운 취약점인가

AI와 자동화 기술의 도입은 식품 안전 분야에서 분명한 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물 생산, 품질 검사, 포장 이상 탐지, 공급망 가시성, 동물 건강 모니터링까지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예측 분석 기반의 위험 감소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기술 낙관론에 중요한 단서를 붙인다. 자동화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시스템 장애나 사이버 공격이 미치는 파급력도 함께 커진다는 것이다. 식품 안전 리스크 관리의 프레임 안에 사이버보안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AI는 방패가 될 수 있지만, 그 방패에 균열이 생기면 오히려 더 넓은 취약점이 드러난다.

이 맥락에서 제품 리콜 보험의 중요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사고를 완전히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사고 이후의 회복력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한다. 리콜 비용, 폐기·수거, 브랜드 복원, 영업 중단 손실을 포괄하는 전문 리콜 보험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공급망이 복잡하고 다단계인 기업일수록, 보장 범위를 공급망 구조에 맞게 설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식품 안전은 공급망 전체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저자들이 결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술도, 보험도, 규제도 아니다. 생산자에서 가공업체, 유통업체, 소비자까지 이어지는 전 단계에서 추적성(Traceability)과 책임성을 내재화하는 문화다. 아무리 정교한 리스크 관리 도구도, 공급망 각 단계에서 책임 있는 소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2026년 식품 안전 리스크 관리의 지형은 복잡해졌다. 규제는 분산되고, 위협은 다양해졌으며, 기술은 기회이자 위험이 되었다. 이 복잡성을 단순한 준수 체계로 관리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필요한 것은 변화하는 위험의 성격을 직시하고, 예방과 회복을 동시에 설계하는 통합적 사고다. 이 기사는 그 출발점으로서의 진단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원문: "2026 Trends in Food Safety Risk Management", RM Magazine, 2026.05.20 저자: David Ruppel · Benjamin Peetz (Westfield Insurance) https://www.rmmagazine.com/articles/article/2026/05/20/2026-trends-in-food-safety-risk-management


2026년 5월 23일 토요일

ESG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 기업은 이제 '내부'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2026년 5월, 글로브스캔이 발표한 조사 하나가 조용하지만 묵직한 파장을 던졌다. 전 세계 대기업 커뮤니케이션 및 대외협력 전문가 약 300명에게 물었다. "당신의 회사가 직면한 가장 큰 ESG 평판 리스크는 무엇인가?"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거버넌스(G), 45%. 환경(E), 27%. 불과 2년 전만 해도 이 수치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환경이 39%, 거버넌스가 29%였다.

숫자가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순위가 바뀐 것이 아니다. 기업을 바라보는 이해관계자들의 시선 자체가 이동했다는 신호다.


오랫동안 ESG 담론의 중심에는 환경(E)이 있었다. 기후위기, 탄소배출, 넷제로 선언. 이 언어들이 지속가능성 보고서의 표지를 장식했고, 기업의 친환경 이니셔티브는 홍보 전략의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투자자들도 기후 리스크를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했고, 규제 기관들은 스코프 1·2·3 공시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환경 리스크는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넷제로 목표를 세우는 법을 배웠고, 탄소 회계 담당자를 채용했으며, 공시 템플릿을 숙달했다. 규제의 언어가 정형화될수록, 대응의 루틴도 자리를 잡았다. 환경 리스크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

문제는 그 사이 전혀 다른 종류의 위험이 조용히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버넌스 리스크는 본질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 환경 공시는 측정 가능한 지표가 있다. 탄소 배출량은 숫자로 나타나고, 재생에너지 비중은 퍼센트로 표현된다. 하지만 거버넌스의 실패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화된다. 내부 고발자가 입을 열 때, 이사회가 경영진의 비윤리적 판단을 묵인했을 때, 공급망 어딘가에서 인권 침해가 발각될 때, 그리고 기업이 공언했던 약속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이 드러날 때. 이 모든 순간은 사전에 수치로 예측하거나 보고서로 봉합하기 어렵다.

글로브스캔의 아프리카 총괄 안네케 그레이링은 이렇게 진단했다. "기업 내부의 투명성, 윤리 경영, 컴플라이언스 실패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감시망이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해졌다." 이 문장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구조적 변화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이해관계자들의 관심이 기업의 '외부 영향'에서 '내부 작동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회사가 기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에서, 이 회사 안에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로. 넷제로를 선언한 CEO가 동시에 이사회를 자신의 친위대로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ESG 보고서는 아름답지만, 내부 고발 채널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공급망 실사 보고서에는 서명했지만, 1차 협력사 너머의 실태는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 투자자와 소비자, 규제 기관의 입술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린워싱 논란이 거버넌스 리스크 부상의 결정적 촉매였다는 점도 짚을 필요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잇따른 그린워싱 소송과 규제 제재는 단순히 환경 커뮤니케이션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거버넌스의 실패였다. 이사회가 허위 공시를 묵인했거나, 내부 검증 체계가 없었거나, 경영진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했다. 환경을 내세운 사기는 결국 지배구조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ESG의 세 글자 사이에 숨어 있던 위계가 재편된다. E와 S를 진정성 있게 실현하려면 G가 먼저 작동해야 한다. 탄소 감축 목표를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이사회가 있어야 하고, 공급망 인권 문제를 내부에서 감지하고 보고할 수 있는 채널이 살아 있어야 한다. 거버넌스는 ESG의 세 번째 항목이 아니라, 나머지 두 항목이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토대다.


이번 조사 결과가 한국 기업들에 던지는 함의는 특히 크다. 국내 ESG 담론은 지난 몇 년간 환경 공시와 탄소 감축에 집중되어 있었다. TCFD 도입, 온실가스 감축 목표, 재생에너지 전환 — 이 모든 것은 중요하고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사회 독립성, 내부통제 시스템, 공급망 실사, 내부 고발 보호 제도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

지속가능성 조직이 법무·감사·리스크관리·컴플라이언스 팀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한다는 조사의 권고는 단순한 조직 설계 제언이 아니다. 그것은 ESG가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라 경영의 내부 논리로 내면화되어야 한다는 요구다.


ESG는 오랫동안 '보여주는' 언어였다. 보고서, 선언, 목표치, 인증. 이 모든 것이 외부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거버넌스 리스크의 부상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제 이해관계자들은 발표가 아니라 내부를 들여다보려 한다. 조직 안에서 권력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무엇을 알았는지, 그 앎이 어떤 결정으로 이어졌는지.

기업의 평판은 점점 더 안에서 결정된다. 밖에서 잘 꾸며진 ESG 보고서보다, 안에서 누군가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문화가 더 강력한 리스크 방어막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숫자가 먼저 알아챘다. 이제 기업이 알아챌 차례다.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2026년 기업들이 우려하는 규제는 무엇인가

경총 기업규제 전망조사 심층 분석


보고서 소개

발행처: 한국경영자총협회(KEF 경총), 회장 손경식
제목: 2026년 기업규제 전망조사
발행 시점: 2026년 4월
조사 수행: ㈜모노리서치
조사 기간: 2026년 1월 20일 ~ 2월 10일
조사 방법: 구조화된 설문지를 통한 전화·팩스·이메일 조사
조사 대상: 전국 50인 이상 기업 중 설문에 응답한 517개사

응답 기업의 규모별 분포를 보면, 1,000인 이상 대기업이 62개사(12.0%), 300~999인 중견기업이 153개사(29.6%), 50~299인 중소기업이 302개사(58.4%)로 구성되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 306개사(59.2%), 비제조업 211개사(40.8%)였다. 중소·중견기업 비중이 88%에 달해 현장 밀착형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이 조사의 목적은 국내 기업들의 2026년 기업 규제 전망과 정부에 바라는 규제혁신 정책을 분석함으로써 규제합리화를 위한 정책 제언의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다.


517개 기업은 2026년을 어떻게 전망했나

1. 정부 규제합리화 노력 — "만족"이 다수지만 긴장감은 여전

응답 기업의 **63.8%**가 정부의 규제합리화 노력에 "만족"한다고 평가했다. 세부적으로는 '매우 만족' 2.3%, '다소 만족' 61.5%로 구성되었다. 반면 '불만족' 응답은 23.4%(매우 불만족 3.7% + 다소 불만족 19.7%), '기타(모르겠음 등)'는 12.8%였다.

만족도가 비교적 높게 나온 배경에는 구조적인 변화가 있다. 기존 규제개혁위원회가 규제합리화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위원장이 대통령으로 격상되었고, 부위원장 3인이 위촉되었으며, 전체 위원 수도 25인 이하에서 50인 이하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규제 개선 의지 표명이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만족 응답 중 '매우 만족'이 2.3%에 불과하고, 불만족 응답이 4명 중 1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기업 현장의 체감 개선이 여전히 제한적임을 방증한다.

2. 2026년 가장 큰 부담 규제 — 안전·노동·환경이 3대 축

복수응답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들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규제 순위는 다음과 같다.

규제 항목 응답률
중대재해 처벌 등 안전 규제 49.9%
근로시간 규제 25.0%
탄소중립 등 환경 규제 15.5%
상속세·법인세 등 세제 규제 11.2%
개인정보보호 관련 규제 8.1%
상법 규제 7.9%
기타 5.6%

거의 절반에 가까운 기업이 중대재해처벌법으로 대표되는 안전 규제를 최우선 부담으로 지목했다. 이는 단순한 법적 리스크를 넘어 경영 전반에 걸친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3. 정부에 바라는 규제혁신 정책 — 적극행정 면책과 총량 감축

복수응답 기준으로 기업들이 가장 원하는 규제혁신 정책은 다음과 같다.

정책 항목 응답률
공무원의 적극행정 면책 강화 23.8%
규제 총량 감축제 강화 22.2%
의원 입법안 규제 영향분석제 도입 18.1%
메가특구 제도 신설 16.3%
규제샌드박스 실효성 제고 16.3%
기타 14.5%

'공무원의 적극행정 면책 강화'가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이는 기업들이 규제 자체의 철폐보다도, 담당 공무원이 소극적 태도 없이 적극적으로 민원과 허가를 처리해줄 것을 더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다. 제도가 있어도 집행 단계에서 막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4. 글로벌 혁신기업 육성 과제 — 투자와 인재가 핵심

과제 응답률
정부 보조금·국부펀드 등 대규모 투자 지원 42.3%
기술 인재 양성·확보를 위한 교육 개혁 38.1%
첨단산업·신산업 획기적 규제 완화 29.8%
경쟁국 수준의 전기요금 인하 등 인프라 지원 18.6%
해외 투자 유치 인센티브제도 마련 14.5%
도전과 실패를 용인하는 기업가정신 문화 확산 11.8%

숫자 뒤의 맥락 읽기

보고서의 응답률 수치들은 복수응답 기준이기 때문에 단순 합산이 100%를 초과한다. 이 점을 감안하고도 몇 가지 구조적 패턴이 명확히 드러난다.

첫째, 안전 규제의 압도적 지배. 49.9%는 복수응답 환경에서 나온 수치임에도 2위(25.0%)의 두 배에 달한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사실상 현장의 공포 요인 1순위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제조업 비중이 59.2%인 표본 구성을 고려하면, 현장 인력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기업들에게 이 수치는 더욱 절박하게 읽힌다.

둘째, 근로시간 규제(25.0%)와 환경 규제(15.5%)의 동반 부상. 이 두 항목은 글로벌 ESG 기준 강화 및 주 52시간제 이후 추가 유연화 논의가 맞물린 결과다. 세제 규제(11.2%)와 개인정보보호(8.1%), 상법(7.9%)이 뒤를 잇는 구조는 규제 부담이 특정 영역에 집중되지 않고 다층적으로 분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규제혁신 정책 수요의 분산. 1위(23.8%)와 5위(16.3%) 사이의 격차가 크지 않다. 이는 기업마다 처한 규제 환경이 다르고, 단일한 정책 해법보다 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한다.


안전보건, 정보보안, 경영책임의 리스크 관리 — 실무적 함의

안전보건 리스크 — 중대재해처벌법의 구조적 공포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중대산업재해 예방 의무를 부과하고, 위반 시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을 규정한다. 응답 기업의 절반이 이를 최대 부담으로 꼽은 이유는 단순히 벌칙이 무겁기 때문만이 아니다.

핵심은 의무 이행의 불명확성이다.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이라는 포괄적 의무 조항이 현장에서 어느 수준이면 충족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이 모호성이 기업으로 하여금 과잉 준수 비용을 지출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의도치 않은 법 위반 상황에 노출시킨다.

리스크 관리 전략으로는 세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안전보건 전담 조직의 독립적 운영과 경영책임자 직속 보고 체계 구축. 둘째, 사고 발생 시 초동 대응 매뉴얼과 법적 대응 절차의 사전 정비. 셋째, 협력업체를 포함한 공급망 전체의 안전 수준 점검 — 중처법은 도급, 용역, 위탁 관계에서도 원청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보안 리스크 — 개인정보보호법의 조용한 확장

응답률 8.1%로 상위권에 오른 개인정보보호 관련 규제는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개인정보보호법 2023년 개정 이후 강화된 과징금 체계(위반 시 전체 매출액의 3% 이하)와 마이데이터, AI 학습 데이터 규제 논의가 맞물리면서 디지털 전환 중인 기업들의 컴플라이언스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비제조업(40.8%) 응답 기업의 경우 이 항목의 체감 부담은 평균보다 훨씬 높을 가능성이 크다. 금융, 유통, 플랫폼 기업들은 대규모 개인정보 처리가 핵심 비즈니스인 만큼, 규제 위반은 영업 정지 수준의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리스크 관리 핵심은 데이터 거버넌스 체계의 문서화다. 수집-저장-활용-파기의 전 주기를 추적 가능한 형태로 관리하고, 개인정보보호책임자(CPO)의 권한과 책임을 명문화해야 한다.

경영책임 리스크 — 상법 규제와 이사 의무의 확장

상법 규제(7.9%)가 별도 항목으로 등장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부터 이어진 상법 개정 논의, 특히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에서 이해관계자로 확장하는 방향의 개정안은 기업 경영진에게 새로운 법적 불확실성을 안긴다.

이사회 의사결정 과정에서 특정 결정이 '이해관계자에 대한 충실의무'를 위반했다는 주장이 제기될 경우, 그 방어 논리를 사전에 구축해두지 않으면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에 의한 보호를 받기 어려울 수 있다. 이사회 의사록의 정밀한 작성과 의사결정 근거의 체계적 문서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종합적인 시사점

2026년 기업규제 전망조사는 몇 가지 구조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 안전 규제가 경영 아젠다의 최상위에 올랐다. 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중처법 시행 이후 매년 반복적으로 최상위 부담 규제로 꼽히는 패턴은, 이 규제가 한국 기업 경영 환경의 구조적 변수로 고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규제 완화보다는 명확한 이행 기준 제시가 더 시급한 과제다.

둘, 기업들은 규제의 '양'보다 '질'을 문제 삼고 있다. '공무원의 적극행정 면책 강화'가 규제혁신 정책 1순위라는 사실은, 기업들이 규제 자체의 철폐보다 행정 집행 단계의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을 더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규제 총량 감축보다 규제 집행의 신뢰성 제고가 선결 과제일 수 있다.

셋, 혁신 생태계 조성의 전제는 투자와 인재다. 글로벌 혁신기업 육성을 위해 규제 완화(29.8%)보다 대규모 투자 지원(42.3%)과 교육 개혁(38.1%)이 더 높은 응답률을 기록했다. 이는 규제 개혁 일변도의 정책보다 투자 생태계와 인적 자본 확충을 동반한 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기업 현장의 인식을 반영한다.

넷, 의원 입법의 규제 영향분석 공백이 현실적 위협이다. 응답 기업의 18.1%가 의원 입법안에 대한 규제 영향분석제 도입을 요구했다. 현재 정부 입법안에는 규제영향분석이 의무 적용되지만 의원 입법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 입법 추이를 보면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규제 입법의 상당수가 의원 입법 형태로 발의되고 있어, 이 공백은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인사이트

이 조사 결과를 단순히 '기업들이 규제가 많다고 불평하는 것'으로 읽으면 본질을 놓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규제 부담의 집중도와 그 구조적 원인이다. 중대재해처벌법 하나가 전체 응답의 49.9%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기업들의 공포가 특정 규제 하나에 극단적으로 쏠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해당 규제의 설계 방식 자체가 현장 불확실성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중처법의 핵심 문제는 결과책임의 구조에 있다. 사업주가 안전관리 체계를 아무리 잘 갖춰도 실제로 사고가 발생하면 곧바로 형사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된다. 이 구조에서 기업 경영자는 완전한 법적 안전지대를 찾을 수 없다. 그 결과 과도한 준법 비용이 발생하고, 일부 기업에서는 위험 업종 진입 자체를 포기하거나 해당 부문을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유인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규제의 의도(산업재해 감소)와 실제 효과(책임 회피 구조 확산) 사이의 괴리를 심화시킨다. 진정한 산업 안전 향상을 위해서는 처벌 중심 규제 외에 안전 투자 인센티브, 이행 기준의 명확화,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실질적 지원 체계가 병행되어야 한다.

근로시간 규제 부담(25.0%)도 단순한 노동 규제 문제를 넘어 기업 경쟁력 문제와 직결된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격화되는 환경에서 연구개발(R&D) 집약 기업들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인 노동 투입이 불가피하다. 경직적인 근로시간 규제는 이들 기업의 프로젝트 기반 업무 방식과 충돌하며, 결과적으로 핵심 인재들이 스타트업이나 해외 기업으로 이동하는 유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탄소중립 규제(15.5%) 부담은 향후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의 15.5%는 탄소배출권 거래제(K-ETS)와 에너지 효율 규제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수치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본격 시행, 글로벌 공급망에서 탄소 발자국 공개 요구 확산 등을 고려하면, 2027~2028년 조사에서는 이 항목이 2위권으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 탄소 전략을 단순한 컴플라이언스 과제가 아닌 사업 전략으로 내재화할 적기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혁신기업 육성 과제에서 '도전과 실패를 용인하는 기업가정신 문화 확산'이 가장 낮은 응답률(11.8%)을 기록했다는 점은 씁쓸하다. 이 수치는 기업들 스스로가 제도적 지원보다 문화적 변화를 덜 시급하게 여긴다는 의미도 되지만, 동시에 실패 용인 문화 자체에 대한 기대를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는 독해도 가능하다. 혁신 생태계는 결국 제도가 아니라 문화에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이 낮은 수치야말로 한국 기업 환경의 가장 긴 과제를 암시하고 있다.


본 포스트는 한국경영자총협회(KEF)가 2026년 4월 발행한 「2026년 기업규제 전망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분석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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