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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6일 토요일

물(水), 이제는 전략이다


산업문명의 근간은 언제나 물이었다. 철을 녹이고, 반도체 회로를 세정하고, 배터리 셀을 냉각하는 데 물은 빠짐없이 동원된다. 그러나 물은 오랫동안 '공짜에 가까운 자원'으로 취급되어 왔다. 기업의 재무제표 어디에도 물은 진지한 항목으로 등재되지 않았고, 공급망 리스크 평가에서도 물은 변방에 머물렀다. 그 안일함이 이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례는 그 균열의 전형이다. 하루 170만㎥에 달하는 공업용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검토된 방안이, 신규 수자원 개발이 아니라 기존 광역상수도 공급량을 전용하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양강, 충주댐, 화천댐 등 주요 취수원이 WRI 기준으로 이미 'High~Medium-High' 물 스트레스 지역으로 평가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핵심 제조업 거점은 물리적 물 가용성의 한계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다. 산업 입지 선정과 투자 일정에까지 물 문제가 변수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더 이상 환경부의 소관이 아니다. 경영 전략의 영역이다.

2025년 CDP 데이터는 이 위기의 윤곽을 수치로 그려낸다. 국내 응답 기업의 77%가 중대한 물 리스크를 보유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홍수(51건), 물 스트레스(48건), 가뭄(39건) 순으로 리스크가 집계되었는데, 이 세 항목은 서로 무관한 위협이 아니다. 강우가 집중될 때는 홍수로, 건기에는 가뭄과 물 스트레스로 변환되는, 동일한 기후 불안정성의 양면이다. 업종별로는 제약·건강 산업이 88.5%로 노출도가 가장 높고, 산업재 61.2%, IT 60.4%, 선택소비재 50.8% 순으로 이어진다. 물을 단순한 유틸리티 비용으로만 계상해온 기업들에게, 이 수치는 경고음이다.

그럼에도 기업의 물 리스크 재무영향 산정 수준은 아직 초보적이다. 물 리스크의 평균 재무영향 추정액이 약 3,300만 원에 불과한 반면, 기후변화 리스크의 평균은 114억 원에 달한다. 이 격차는 물 리스크가 기후 리스크보다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물 리스크를 측정하고 화폐화하는 역량 자체가 기업 내부에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리스크는 관리될 수 없다. 숫자로 포착되지 않는 위험은 경영 의사결정에서 배제된다.

외부의 압력은 이미 내부의 속도를 앞질러 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에 물 사용량, 폐수 관리 현황, 감축 목표 데이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공급망 전체를 하나의 물 책임 단위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BBVA, IBK 등을 비롯한 금융기관은 지속가능연계대출(SLL)에 물 관련 KPI를 연계하고 있다. 물 데이터를 공시하지 않는 기업은 조달 비용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공시 규범의 흐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EU의 CSRD·ESRS, TNFD, ISSB 등 주요 글로벌 공시 프레임워크들은 물과 해양자원에 관한 공시 요건을 강화하는 추세다. 한국 기업에게 이 흐름은 선택이 아닌 조건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CDP 물 부문 한국 응답 기업 수는 글로벌 응답 기업이 7배 성장하는 동안 135개에서 113개로 오히려 줄었다. 반도체, 자동차, 화학 등 물 사용이 집중된 산업의 주요 기업 중 미응답 기업도 적지 않다. 세계가 물 정보를 요구하는 속도와, 한국 기업이 그 요구에 응답하는 속도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지속가능성이란 말은 흔히 윤리적 당위의 언어로 소비된다. 그러나 물 문제 앞에서 그것은 순전히 경영적 사유다. 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생산이 멈추고, 물 데이터를 제출하지 못하면 공급망에서 이탈하며, 물 리스크를 공시하지 않으면 자본 조달이 어려워진다. 지속가능성은 '착한 기업'의 수사가 아니라, 생존과 경쟁력의 조건이다.

한국 산업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물을 전략적 자원으로 내재화하는 기업과, 여전히 유틸리티 비용의 한 항목으로만 바라보는 기업 사이의 격차는 앞으로 더 가시화될 것이다. 선제적 물 공시와 리스크 관리에 나서는 것은 단순한 ESG 의무 이행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세대의 산업 경쟁력을 지금 설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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