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일 토요일

대표이사라는 자리의 무게 — 책임의 시대를 먼저 읽는 경영자가 살아남는다

경영자에게 가장 외로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실적이 무너지는 날도, 핵심 인재가 떠나는 날도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은 회사를 위해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고 확신하는데, 그 판단이 법정의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일 것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대표이사를 맡았나"라는 자조가 입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말입니다.

2026년 초, 한국 경제면을 채운 사건들은 바로 그 외로움의 이야기입니다. 고려아연의 이그니오 투자 배임 논란,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집단소송, 하이브의 주주 간 계약 소송 패소.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KT 전직 경영진이 소액주주 35명에게 765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 사건, 한미사이언스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1년 가까이 법정을 오가며 소진된 이야기까지.

이 사건들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경영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불편함이야말로, 지금 시대가 경영자에게 보내는 가장 중요한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비난이 아닙니다. 지형도가 바뀐 겁니다.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사건들은 경영자를 비난하기 위해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 사건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것은, 한국 기업 경영을 둘러싼 법적·사회적 지형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10년 전에는 관행이었던 것이 오늘 배임이 되고, 5년 전에는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던 것이 오늘 주주대표소송의 빌미가 됩니다. 지형이 바뀌었는데 예전 지도를 들고 길을 찾으면, 잘못이 아니라 조난이 됩니다.

가장 먼저 이 지형 변화를 읽은 경영자가 리스크를 피하고, 조금 늦게 읽은 경영자가 법정에 서게 됩니다. 이건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정보의 차이이고, 각성의 타이밍 차이입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소액주주들이 실제로 법정에 섭니다. KT 사건에서 소액주주 35명은 2019년에 소송을 제기하여 2026년 대법원 판결까지 7년을 끌어갔습니다. 예전이라면 "개미들이 대기업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이겨봐야 얼마나 되겠냐"는 계산이 합리적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주주행동주의 전문 로펌이 성장했고, 스튜어드십 코드를 이행하는 기관투자자들은 주주총회에서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합니다. 소액주주도 조직화되고, 정보화되고, 무장되었습니다.

이사회 결의는 더 이상 면죄부가 아닙니다. 많은 경영자들이 이사회 의결을 거치면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사회의 실질을 봅니다. 이사회가 형식적으로 운영되었는지, 사외이사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는지, 진정한 독립성이 있었는지를 사후적으로 심사합니다. '도장만 찍은 이사회'는 더 이상 경영자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해외 리스크가 국내 경영자에게 직접 닿습니다.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집단소송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경영진의 책임 문제는 국내까지 연결됩니다. 글로벌 사업을 하는 기업의 경영자는 이제 한국 상법과 미국 증권법, 유럽 GDPR을 동시에 의식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영 판단의 원칙 — 경영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방어막

그렇다고 모든 잘못된 결과가 대표이사의 법적 책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경영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개념이 '경영 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입니다.

이 원칙은 경영자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해충돌 없이, 선의로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설령 사후적으로 불이익한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리입니다. 다시 말해, 경영자는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절차와 동기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법원이 경영자를 압박하는 지점은 실적 부진이 아닙니다. 바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정보 없이 내린 결정입니다. 적절한 실사와 전문가 검토 없이 대규모 투자나 M&A를 결정하면 임무 해태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이해충돌을 감추고 내린 결정입니다. 자신 또는 특수관계인이 이익을 얻는 거래에서 투명하게 이해충돌을 공시하고 해당 결의에서 빠지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셋째, 감시 의무를 저버린 결정입니다. 본인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어도 임원과 조직의 위법 행위를 알면서 방치하거나, 알 수 있었음에도 확인하지 않은 경우에도 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KT 사건에서 대법원이 황창규 전 회장에게 책임을 물은 이유도, 그가 비자금 조성을 직접 지시해서가 아니라 이사로서 이를 감시하고 차단할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나는 몰랐다'는 말이 점점 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영자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가

지형이 달라졌다면, 경영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더 소극적으로 경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명확하고 당당하게 경영하라는 말입니다.

의사결정 과정을 남기십시오. 중요한 경영 판단을 내릴 때는 어떤 정보를 검토했는지, 어떤 전문가 의견을 청취했는지, 어떤 대안을 검토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결과가 나쁘게 나오더라도 프로세스가 건전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회를 진짜 이사회로 만드십시오. 이사회가 경영진을 보호하는 기관이 되려면 이사회 자체가 실질적이어야 합니다. 사외이사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반론을 기록에 남기고, 독립적인 법률·회계 자문을 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번거롭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됩니다.

이해충돌은 숨기지 말고 드러내십시오. 관계사 거래, 오너 일가 관련 의사결정, 경쟁 관계가 있는 투자 등은 이해충돌 가능성을 먼저 선제적으로 공시하고, 해당 결의에서 회피하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법무·컴플라이언스 기능을 경영의 핵심으로 끌어들이십시오. 과거에는 법무팀이 사고가 난 뒤에 수습하는 기관이었다면, 이제는 의사결정 전에 리스크를 짚어주는 기관이어야 합니다. 법무팀이 "이 결정은 주주대표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경영자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소송이 두렵다면, 그것은 이미 신호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법적 책임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감각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경영을 마비시키거나, 필요한 결단을 피하게 만든다면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소송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경영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위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절차를 무시하거나, 이사회를 형식적으로 대하거나, 이해충돌에 둔감하거나, 조직 내 위법 행위에 눈을 감는 경영자는 언젠가 법정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법적 책임에 대한 적절한 긴장감은 경영자의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시킵니다. 영풍-고려아연, 쿠팡, 하이브, KT, 한미사이언스의 사례들은 경영자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모든 경영자에게 보내는 이 시대의 메시지입니다. 절차를 지키는 경영자, 이해충돌에 투명한 경영자, 이사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경영자는 같은 시대에도 당당히 법정 밖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책임의 시대를 먼저 읽는 경영자

한국 기업 경영의 풍토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법원은 점점 더 경영자의 의사결정 과정과 동기를 들여다봅니다. 주주들은 점점 더 조직화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법적 리스크는 국내 경영자에게 직접 연결됩니다.

이 변화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먼저 읽는 경영자에게 그것은 위협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투명한 지배구조, 실질적인 이사회, 선제적 컴플라이언스를 갖춘 기업은 법적 리스크가 낮을 뿐 아니라, 기관투자자와 글로벌 파트너로부터 더 높은 신뢰를 받습니다. ESG 경영의 'G', 지배구조(Governance)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기업 생존의 조건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피고석은 약한 경영자가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준비하지 않은 경영자가 앉는 자리입니다.

준비된 경영자는 법정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영자일수록, 애초에 법정에 서지 않습니다.


이 에세이는 공개된 판결문, 언론 보도, 법원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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