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곡선의 미학, 침묵하는 기와가 도시에게 던지는 질문

서천 읍성의 달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점령한 고층 빌딩들은 수직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들은 중력을 거스르고, 더 높이 올라가며, 주변을 압도하려 든다. 직선은 효율적이고 빠르지만, 인간의 시선에 쉴 곳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시각적 폭력이다. 반면, 당신이 사진에 담은 저 기와지붕을 보라.

1. 자연을 닮은 곡선, '순응'의 건축

한국의 기와지붕, 특히 처마의 곡선은 **'현수선(Catenary)'**이라 불리는 자연스러운 처짐을 닮아 있다. 이는 양쪽 끝을 잡고 줄을 늘어뜨렸을 때 생기는, 중력에 가장 순응하는 곡선이다. 하지만 한국의 목수들은 이 자연스러운 처짐 끝을 살짝 들어 올려 하늘로 비상하는 듯한 경쾌함을 더했다.

이 선은 한국의 산세를 닮았다. 날카로운 알프스의 설산이 아니라,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둥글둥글해진 한국의 야산과 능선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í)

소나무가 왜 기와집과 잘 어울릴까? 한국의 소나무(적송)는 서양의 침엽수처럼 자로 잰 듯 곧게 자라지 않는다. 휘어지고 구부러지며 자란다. 기와지붕의 불규칙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은,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의 가지와 묘한 리듬감을 공유한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조형적 필연이다.

2. 차경(借景), 풍경을 소유하지 않는 태도

고궁에서 느끼는 편안함의 정체는 우리 선조들의 건축 철학인 **'차경(경치를 빌린다)'**에서 온다. 서양의 건축이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액자(Frame)'의 개념이라면, 한옥은 벽을 트고 문을 열어 자연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콘크리트 빌딩은 자연과 인간을 단절시킨다. 유리창은 밖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내부와 외부를 철저히 격리하는 차단막이다. 반면, 기와집은 흙, 나무, 돌이라는 자연 소재로 지어져 숨을 쉰다. 시간이 흐르면 흉물스럽게 낡아가는 콘크리트와 달리, 기와집은 시간의 때를 입으며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당신이 느낀 그 어울림은, 건축물이 "나 여기 있소"라고 소리치지 않고 자연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3. 어지러운 배치 vs. 비움의 미학

당신이 언급한 "고층 빌딩의 어지러운 배치"는 자본의 논리에 따른 결과다. 용적률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한 배치는 질서를 가장한 혼돈이다.

하지만 고궁이나 성곽의 배치는 **'비움'**을 전제로 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마당, 여백은 하늘을 담고 바람을 길어 올린다. 꽉 채우지 않았기에 우리의 시선은 쉴 곳을 찾는다. 달빛이 기와 끝에 내려앉을 수 있는 것도 그 여백 덕분이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회귀'다

당신이 기와집과 자연의 조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본래 흙과 나무, 그리고 곡선의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직선과 콘크리트의 숲은 인류 역사에서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저 사진 속, 밤의 정적을 지키는 누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자연을 정복한 곳인가, 자연과 더불어 숨 쉬는 곳인가?"

어지러운 도시의 삶에 지칠 때, 기와지붕의 곡선을 눈으로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뇌는 휴식을 얻는다. 당신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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