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산업현장에서 '중대재해 제로'는 모든 조직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존립의 근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많은 기업이 중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야 조사 역량을 집중하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대응에 머물고 있다. 한국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최근 기고를 통해, 사고조사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한 책임 추궁이 아닌 '미래 사고의 선제적 차단'에 있음을 역설하며, 이를 위한 근본적인 안전 철학의 체질 개선을 촉구했다.
하인리히의 법칙을 넘어선 예방적 데이터의 확장
많은 조직이 가시적인 중대사고에만 매몰되어 그 이면에 숨겨진 무수한 징후들을 간과한다. 하지만 사고의 규모가 작을수록 발생 빈도가 높다는 통계적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경미한 재해와 아차사고(Near-miss)는 중대재해로 가는 전조 증상이자, 비용 측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예방 정보의 원천'이다.
실제로 대형 참사는 갑작스러운 우연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던 작은 결함들이 누적된 결과다. 이러한 작은 징후들을 단순한 운 좋은 모면으로 치부하지 않고, 이를 정밀하게 수집하여 분석할 때 비로소 견고한 안전망이 구축된다. 사고조사의 범위를 결과의 중대성에서 잠재적 위험성으로 확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사 목적의 이원화: 책임 규명과 재발 방지의 분리
현재 우리나라의 사고조사는 수사기관의 '책임자 처벌'에 과도하게 편향되어 있다. 수사기관의 조사는 본질적으로 형사적 책임을 묻기 위한 범죄 구성요건 확인에 집중하므로, 사고를 유발한 배후 요인이나 복합적인 잠재 결함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
기업은 수사 결과나 사법적 판단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자체 기술조사'를 병행해야 한다. 사고의 이면에 숨겨진 조직적 결함, 공정의 취약성, 그리고 관리 체계의 허점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전문적인 사고조사의 핵심이다. 처벌을 위한 조사가 '누가' 잘못했는지를 묻는다면, 예방을 위한 조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휴먼에러에 대한 인본주의적 접근과 PSF 분석의 필요성
사고의 원인을 작업자의 부주의나 실수로 규정짓는 순간, 대책은 교육 강화나 정신 무장이라는 공허한 구호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휴먼에러는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사고조사의 초점은 "누가 실수했는가"라는 지탄에서 벗어나, 인간이 실수할 수밖에 없게 만든 상황적 맥락, 즉 행동형성요인(Performance Shaping Factors, PSF)으로 옮겨가야 한다. 작업 환경, 장비의 설계, 심리적 압박, 조직의 문화 등 다각적인 요인을 분석하여 인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조직 차원의 관리 체계를 작동시켜야 한다. 실수를 유발하는 환경을 그대로 둔 채 개인의 주의력에만 기대는 것은 사고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 인사이트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자는 타인의 경험에서 배운다. 그러나 가장 지혜로운 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의 징후로부터 배운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안전은 시스템의 신뢰성에서 시작된다
결국 사고조사의 질은 발생한 피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조사가 미래의 위험을 얼마나 정확히 예측하고 차단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사망사고와 같은 중대재해에 대해서는 장기간의 정밀 조사를 통해 근본 원인을 발굴하되, 일상에서 발생하는 아차사고에 대해서도 그것이 중대재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휴먼에러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시스템의 결핍으로 수용하고, 작은 사고의 기록을 소중한 학습의 기회로 전환하는 조직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정진우 교수의 고언처럼, 이제는 책임 추궁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안전 관리 체계를 확립하여 '예방 중심의 사고조사 문화'를 정착시켜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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