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다른가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규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매년 수천 건의 아차사고 신고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직원들, 현장에 BBQ 트레일러를 끌고 나타나는 안전팀,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안전 교육 정식 과정에 편입시킨 건설사. 이것이 2025년 EHS Today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들'의 실제 모습이다.
EHS Today의 'America's Safest Companies Award'는 2002년부터 시작된 미국 최고 권위의 산업 안전 시상식이다. 단순히 사고가 적은 회사를 뽑는 게 아니다. 경영진이 안전을 얼마나 진심으로 챙기는지, 직원들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안전 문화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그 효과를 데이터로 입증할 수 있는지까지 따진다. 쉽게 말해, 서류가 아닌 현장을 보는 상이다.
2025년 수상 기업은 단 6곳. 3만 8천 명을 고용한 글로벌 방위산업체 KBR부터, EHS 전문가가 2명뿐인 중소기업 망간까지 규모도 업종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안전은 팀 하나가 관리하는 업무가 아니라, 조직 전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 이 글은 수상 기업들의 안전 전략과 리더십을 산업별로 해부하고, 한국 기업들이 지금 당장 참고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정리했다.
이 어워즈가 왜 중요한가
EHS Today의 'America's Safest Companies Award'는 2002년에 창설된 이후 23년간, 직장 안전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달성한 기업들을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안전 업계 전반에 공유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왔다.
이 상이 단순한 홍보용 트로피가 아닌 이유가 있다. 수상을 위해서는 경영진의 EHS 지원, 직원의 안전 프로세스 참여, 혁신적 안전 솔루션, 업계 평균 이하의 재해율, 포괄적 교육 프로그램, 예방 중심의 안전 문화, 효과적인 안전 소통 방식, 그리고 안전 프로세스의 효과를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데이터가 모두 갖춰져야 한다.
지금까지 약 300개 기업이 이 상을 받았으며, 일부 기업은 수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2025년 수상식은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에서 열린 Safety Leadership Conference 2025에서 진행되었으며, 아폴로 기계의 Mike Ellis, 망간의 Mary Gurasich, KBR의 Keith Kluger가 수상자 패널로 참여했다.
산업별 수상 기업 분석
과학기술 분야
KBR (케이브르)
과학·기술·엔지니어링 솔루션 / 휴스턴, 텍사스
직원 38,000명 | 사업장 169곳 | EHS 전문가 146명
KBR은 포천 500대 방위산업 기업으로, 안전 철학의 핵심은 'Zero Harm'이다. 부사장 Nick Anagnostou는 이 원칙이 직접 고용 인력뿐 아니라 하청업체 운영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적용된다고 밝혔다.
KBR의 안전 거버넌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절대 원칙(Zero Harm Absolutes)'의 체계다. 작업 중단 권한을 모든 직원·협력사·고객에게 부여하는 'MyKey', 불안전한 행동을 일상적으로 모니터링하는 'Courage to Care Conversations', 모든 사고와 아차사고를 반드시 조사하는 원칙, 그리고 현장 및 사무실의 일상적 위험 요소에 대한 글로벌 지침인 'KBR's Keys'가 이 체계를 구성한다.
특히 'Safety Energy Program'은 모든 프로젝트 현장의 안전 추진력을 측정하는 글로벌 선행지표 프로그램으로, 높은 Safety Energy 수치가 사고 감소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사람·지구·거버넌스 세 축에 집중하며, 10개의 Zero Harm 핵심지표를 통해 UN의 2030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와 연계된 장기 목표를 추적하고 있다.
망간 주식회사 (Mangan Inc.)
석유·가스·파이프라인·제조·바이오제약 / 롱비치, 캘리포니아
직원 375명 | 사업장 9곳 | EHS 전문가 2명
망간의 사례는 규모가 작아도 안전 문화가 탁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EHS 전문가가 단 2명뿐이지만, 시니어 안전 프로그램 매니저 Mary Gurasich가 이끄는 'SMART Card' 프로그램은 직원들이 스스로 작업 환경을 관찰·기록하고 개선 의견을 제안하도록 장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프로그램 이름 자체도 직원들이 직접 지었다.
지난해에만 6,000건 이상의 제출이 이뤄졌으며, 이 중 600여 건이 실제 안전 관행의 개선으로 이어졌다. 위험한 현장에 안전 팀이 상주할 수 없는 구조임에도, 직원들은 언제든 작업 중단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는 직원 참여도와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낸 핵심 동력이 됐다.
전체 인력의 약 25%가 본연의 업무 외에 자발적으로 안전 활동을 지원하며, 비상 대피 조율, 응급처치, CPR 훈련, 전기 안전 컴플라이언스 등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제조 분야
알바니 엔지니어드 컴포지츠 (Albany Engineered Composites)
항공우주 제조 / 로체스터, 뉴햄프셔
직원 1,400명 | 사업장 6곳 | EHS 전문가 7명
EHS 시니어 디렉터 Bryan Valdez는 "모든 사고는 예방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신념"이라며, 최우선 과제로 중대재해(SIF) 유발 가능성이 있는 행동·상태·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을 꼽았다.
이 목표를 위해 'SIF 관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각 사업장의 리더십이 제조 현장에 직접 나가 작업 과정을 관찰하고 안전한 행동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핵심은 '경영진의 현장 개입'이다. 수동적으로 보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리더가 직접 현장에 서 있는 구조다.
BL 하버트 인터내셔널 (B.L. Harbert International)
건설 / 버밍햄, 앨라배마
직원 885명 | 사업장 38곳 | EHS 전문가 30명
부사장 Frank Wampol은 "모든 직원이 매일, 안전을 자신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길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안전 계획, 환경 민감성, 교육, 인력 역량 강화, 그리고 조직 전체의 일관된 책임 체계가 안전 문화와 전반적 성공의 필수 요건이라고 강조했다.
BL 하버트는 2014년에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어, 단기적 성과가 아닌 지속적인 안전 경영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건설 분야
아폴로 기계 (Apollo Mechanical)
건설 / 워싱턴주 케네윅
직원 3,400명 | 사업장 10곳 | EHS 전문가 48명
2025년 수상 기업 중 가장 독보적인 접근법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폴로는 안전의 범위를 신체적 위험을 넘어 정신 건강 영역으로 확장했다.
건강·안전 매니저 Mike Smail은 "건설업에서 자살률이 모든 산업재해 사망률의 5배에 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실제로 매년 한 명씩 가족을 잃고 있었지만 업무 외 사망이라는 이유로 공식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물질 남용, 목적의식, 재정적 건강, 신체적 웰빙, 영양, 스트레스, 사회적 연결 등 회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살 위험 요인들을 구체화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들을 하나씩 도입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SPACE(Suicide Prevention and Community Engagement)'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때, 자살 가능성은 낮아지고 도움을 구할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인식이 프로그램의 기반이 됐다. EHS 팀은 현장에 BBQ 트레일러를 끌고 나가 축하 점심을 제공하거나, 직원 사기가 저하됐을 때 현장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유대감을 쌓는다.
세반 멀티사이트 솔루션 (Sevan Multi-Site Solutions, Inc.)
상업용 건물 건설 / 다우너스 그로브, 일리노이
직원 371명 | 사업장 2곳 | EHS 전문가 5명
안전 담당 부사장 Chris Carter는 "세반에서 안전은 요건이 아니라 책임이자 차별화 요소이며, 매일 살아 숨 쉬는 헌신"이라고 말했다. 세반은 OSHA 컴플라이언스를 뛰어넘는 자체적으로 높은 안전 기준을 설정해 예방 우선, 실시간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안전 문화의 보상 구조도 눈길을 끈다. 'Sevan Salute'는 안전 교육을 이수하거나, 아차사고를 신고하거나, 회사 가치를 실천한 직원에게 배지와 상품을 수여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에는 아차사고 1건 신고당 7달러를 지급하고 그 금액을 건설업 자살 예방 단체에 기부하는 'Near Miss Challenge'를 시작했는데, 역대 최다 아차사고 신고 건수를 기록했다.
Jim Evans가 창설한 'Sevan Annual Safety Excellence Awards'는 매년 사내 심포지엄에서 직원·고객·협력사·파트너 중 안전에 기여한 이들을 공개 표창하는 자리다.
한국 기업들이 참고해야 할 인사이트
2025년 수상 기업들의 안전 전략을 들여다보면, 한국 산업계가 벤치마킹해야 할 공통 원칙들이 뚜렷이 보인다.
① 경영진의 '현장 참여'가 문화를 만든다
KBR, 알바니, BL 하버트 모두 최고 경영층이 보고서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안전을 확인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전팀에게 위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리더가 안전의 얼굴이 되는 것이 핵심이다.
② 규모가 작아도 문화가 탁월할 수 있다
EHS 전문가가 2명뿐인 망간이 6,000건 이상의 자발적 안전 신고를 이끌어낸 것은 인원이나 예산이 아니라 '시스템과 신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많은 한국 제조·건설 분야에서 직접 적용 가능한 모델이다.
③ 안전의 범위를 신체 너머로 확장하라
아폴로의 정신 건강·자살 예방 프로그램은 한국 건설업 현장의 실정과도 맞닿아 있다. 산업재해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사망을 직접 다루기 시작한 것은 안전 경영의 새로운 지평이다.
④ 아차사고(Near Miss) 신고를 처벌이 아닌 보상으로
세반의 '1건당 7달러 기부' 방식은 소박하지만 강력한 행동 변화를 이끌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아차사고를 숨기는 문화가 남아 있는데, 이를 뒤집는 인센티브 구조 설계가 시급하다.
⑤ 안전을 UN SDGs와 연결하는 ESG 거버넌스
KBR이 10개 Zero Harm 지표를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와 연동한 것은 안전이 ESG 경영의 핵심 지표임을 보여준다. 한국 대기업들이 ESG 보고서에 안전 데이터를 어떻게 담을지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참고: EHS Today, America's Safest Companies 2025 (www.ehs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