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전략적 후퇴인가 속도의 조절인가
글로벌 지속가능성 규제의 파고를 선도하던 유럽연합(EU)이 최근 전략적 후퇴를 단행했다. 지난 2월 26일 발표된 'EU 옴니버스 패키지(Omnibus Package)'는 가파른 규제 도입으로 인한 기업의 행정적 부담을 완화하고 역내 산업 경쟁력을 보전하려는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삼일PwC가 분석한 이번 개정안은 CSRD, CSDDD, EU 택소노미라는 3대 축을 중심으로 적용 범위의 대폭 축소와 이행 시기 유예를 골자로 하고 있다.
1. CSRD: 공시 대상의 정예화와 속도 조절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의 적용 문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보고 범위의 상향 조정: 기존 임직원 500명 기준이 1,000명으로 강화되면서 상당수 기업이 의무 공시권에서 벗어났다. 특히 상장 중소기업(SME)은 아예 제외되어 규제 부담을 덜게 되었다.
이행 시기 유예: 비상장 대기업(웨이브 2)의 공시 시점이 2026년에서 2028년으로 2년 연기되어 준비 시간을 벌었다.
인증 요건의 완화: 검증 수준을 '합리적 확신'으로 강화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제한적 확신'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기업의 비용 부담을 경감했다. 다만, 이해관계자들의 핵심 관심사인 '이중 중대성' 평가는 그대로 유지되어 보고의 질적 수준은 여전히 요구된다.
2. CSDDD: 실사 주기의 장기화와 책임의 합리화
공급망 실사 지침(CSDDD)은 실효성 확보와 기업의 방어권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실사 범위 및 주기 조정: 가치사슬 전반에 걸친 매년 모니터링 의무가 5년 주기로 대폭 완화되었다. 실사 범위 또한 직접 공급업체(Tier 1) 중심으로 구체화되어 기업이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되었다.
민사 책임 및 벌칙 완화: 전 세계 순매출액의 5%에 달하던 벌과금 하한선 규정이 삭제되고, 획일적인 민사 책임 조항 대신 국가별 개별 제도를 따르도록 변경되었다.
기후 전환 계획의 의무 완화: 기후변화 완화 계획의 '이행' 의무가 삭제되고 '채택'에 중점을 둠으로써,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보다는 절차적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3. EU 택소노미: 자율성 확대와 행정 간소화
녹색 분류 체계인 택소노미 규정은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옵트인(Opt-in) 제도 도입: 의무 대상이 아닌 기업도 자발적으로 택소노미 적합성을 공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친환경 자본 유치를 원하는 기업의 선택권을 보장했다.
공시 데이터의 슬림화: 복잡했던 여러 템플릿을 하나로 통합하여 데이터 포인트를 최대 70%까지 축소했다. 이는 공시를 위한 행정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조치다.
부분 적합성 인정: 완벽한 기준 충족이 아니더라도 일부 적합 활동에 대한 보고를 허용하여, 기업의 점진적인 녹색 전환을 독려하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4. 전략적 시사점: 규제 완화가 '면죄부'는 아니다
이번 옴니버스 패키지는 기업에 분명한 숨통을 틔워주었으나, 이를 ESG 경영의 후퇴로 오판해서는 안 된다. EU의 근본적인 탈탄소 목표와 지속가능성 철학은 변함이 없으며, 단지 이행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호흡 조절'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규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시기가 늦춰졌다고 해서 준비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글로벌 투자자와 고객사들은 여전히 법적 의무 이상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자발적 공시기준(VSME) 등을 활용해 내부 역량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기업만이 향후 다시 강화될 규제 환경에서 진정한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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