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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8일 토요일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 숫자로 보는 제품결함 리스크

미국의 제조물책임 소송 시장 규모는 연간 수백억 달러다. RAND Corporation 추산 기준, 미국 전체 불법행위 소송 비용 중 제조물책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GDP의 약 2%에 육박한다. 그리고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부담한다. 2026년 3월 현재 ClassAction.org에 등재된 제품결함 집단소송 7건은 그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 유아용품: 리콜 발표 = 결함 인지 증거

2025년 11월, ByHeart는 Whole Nutrition 유아용 조제분유에 대한 자발적 리콜을 발표했다. 선제적 조치로 보였지만, 미국 법체계 안에서 이 발표는 곧바로 소송의 탄약이 됐다.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에서 자발적 리콜은 역설적으로 제조사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리콜은 제조사 스스로 결함 존재를 인정한 행위로 해석된다. CPSC(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 리콜 데이터에 따르면, 리콜 발표 후 관련 집단소송이 제기되기까지 걸리는 평균 기간은 30일 이내다.

유아용 식품 소송에서 배상 청구액이 다른 제품군보다 높은 이유는 피해자가 영유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법원은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피해자에 대해 제조사의 주의 의무 수준을 최고로 설정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될 경우 실제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이 가능하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미국향 유아·아동용 제품 제조사는 리콜 결정 시점에 소송 대응 프로토콜을 동시 가동해야 한다. ② 리콜은 소비자 안전 절차, 소송 대응은 별개의 법적 프로세스다. 같은 팀이 처리하면 실패한다.


2. 레저·운송 장비: 안전 경고가 면책이 되지 않는다

Malibu Boats는 특정 모델에서 선수 침수로 인해 최소 탑승 인원을 태울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안전 경고를 자사 채널을 통해 공지했다. 이후 제기된 소송에서 이 경고문은 오히려 피고에게 불리한 증거로 활용됐다.

미국 법원은 '경고 결함(Warning Defect)' 이론과 '설계 결함(Design Defect)' 이론을 별도로 판단한다. 경고를 붙였다고 해서 설계 결함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결함을 인지한 상태에서 판매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징벌적 손해배상 요건인 '고의적 무시(Conscious Disregard)'에 해당할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BMW of North America v. Gore, 1996)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실제 손해의 단일 자릿수 배율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했지만, 실제 하급심에서는 여전히 수배의 배상이 인정되는 사례가 반복된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레저 장비, 선박, 이동수단 수출 기업은 내부 품질 보고서와 소비자 불만 접수 기록을 소송 증거 관점에서 관리해야 한다. ② 결함 인지 후 내부 이메일, 회의록에 남긴 표현 하나가 징벌적 손해배상 근거가 된다.


3. 건자재·설비: 소멸시효가 판매 종료 후에도 흐른다

Mueller 미니 스플릿 라인 세트와 Uponor PEX 배관 소송은 건축 설비 자재의 잠복형 결함(Latent Defect)이 어떤 법적 리스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구리 튜브 미세 균열, PEX 배관 누수 모두 설치 후 수년이 지나 발현된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제조물책임 소멸시효의 기산점은 '피해 발생 시점' 또는 '피해 발견 시점(Discovery Rule)' 중 늦은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 즉 제조사가 해당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10년이 지났더라도, 소비자가 그 시점에 결함을 발견했다면 소송이 가능하다.

미국 내 설치된 PEX 배관 물량은 수천만 미터 단위다. 집단소송으로 묶일 경우 원고단 규모와 배상 총액은 단일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한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건자재·배관·전기 부품·냉난방 설비 수출 기업은 판매 종료 이후에도 소송 리스크를 최소 10~15년 단위로 관리해야 한다. ② 미국향 건설 자재 수출 시 장기 제조물책임보험(Occurrence-based Policy) 설계가 필수다.


4. 디지털 플랫폼: 알고리즘 설계가 '제품 결함'으로 간주된다

로블록스 소송은 디지털 서비스에 제조물책임 이론이 적용되는 최전선 사례다. 원고들의 주장은 플랫폼의 연령 인증 부재, 성인-아동 접촉 차단 실패, 허술한 신고 시스템이 '설계 결함'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온라인 플랫폼의 책임을 제한해온 통신품위법 제230조(Section 230)는 최근 아동 보호 영역에서 적용 예외 논의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2024년 이후 복수의 주에서 아동 온라인 보호법이 시행됐고, 연방 차원의 입법 논의도 가속화됐다. 로블록스 소송은 이 법적 환경 변화와 맞물려 진행 중이다.

소셜미디어 중독 소송은 현재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제품책임 집단소송 중 하나로 발전하고 있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틱톡·스냅챗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 건수는 수천 건에 달하며, 주장의 핵심은 무한 스크롤, 변동 보상 알고리즘(Variable Reward Schedule), 수면 시간대 푸시 알림이 의도적으로 설계된 중독 유발 기제라는 것이다. 비디오게임 중독 소송도 동일한 이론적 틀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미국에 앱·게임·소셜 플랫폼을 출시하는 기업은 참여 유도 기능 설계 단계에서 법적 검토를 병행해야 한다. ② 아동·청소년 이용자가 포함된 서비스라면 Section 230 의존 전략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③ 내부 사용자 행동 데이터, A/B 테스트 결과, 중독성 관련 내부 연구가 소송에서 핵심 증거로 제출된다.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의 구조적 특성 5가지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은 한국 기업들이 경험한 어떤 법적 환경과도 다르다. 다음 다섯 가지는 반드시 전제로 깔고 있어야 한다.

① 3가지 결함 이론이 동시에 적용된다 설계 결함(Design Defect), 제조 결함(Manufacturing Defect), 경고 결함(Warning Defect)은 각각 독립적인 소송 근거다. 하나를 방어해도 나머지 두 개가 남는다.

② 집단소송(Class Action)은 배상액을 수직으로 올린다 1인 피해액이 $500이어도, 원고단이 10만 명이면 청구액은 5,000만 달러가 된다. 여기에 변호사 비용, 징벌적 손해배상이 더해진다.

③ 내부 문서는 적이 된다 미국 소송의 증거개시(Discovery) 절차에서 이메일, 품질 보고서, 설계 회의록 전부가 상대방에게 제출된다. 결함을 알면서 출시했다는 흔적이 하나라도 나오면 사건의 성격이 바뀐다.

④ 아동 피해는 배상 수준이 다른 카테고리다 유아용품, 아동 플랫폼, 청소년 대상 서비스에서의 피해는 법원이 최고 수준의 주의 의무를 부과한다. 징벌적 손해배상 인정 가능성도 가장 높다.

⑤ 잠복형 결함은 소송 시효가 늦게 시작된다 건자재·설비처럼 결함이 수년 후 드러나는 제품은 판매 종료 후에도 오랫동안 소송 위험 아래 놓인다. 단기 보험과 단기 품질 보증으로 커버되지 않는다.


미국 시장에서 제품을 파는 것은 그 제품의 전체 수명 주기에 걸쳐 법적 책임을 지는 계약에 서명하는 것과 같다. 이 계약의 조건을 사전에 읽지 않은 기업만이 소송을 갑작스럽게 맞는다.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중국 법원, 보증기간 지나도 책임 — 하베스터 화재 사건의 경고

보증서의 만료일은 제조사의 책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결함이 숨어있던 시간이 드러나는 날일 수 있다.


중국 법원, 보증기간 지나도 제조사 책임 면제 안 된다 — 하베스터 화재 사건의 경고

사건 개요

2024년 9월 29일, 중국 최고인민법원(SPC)은 제품 품질 관련 주요 전형 사례 묶음을 공개했다. 그 중 하나가 보증기간 경과 후 제품 결함에 대한 제조물 책임을 다룬 사건이다. 사건 번호는 (2023) 冀05民终4841号, 판결 법원은 허베이성 싱타이 중급인민법원(邢台市中级人民法院)이다.

원고는 피고로부터 하베스터(수확기)를 구매했으며, 해당 제품에는 12개월 보증이 적용되었다. 사용 16개월 후 기기의 배선 불량으로 화재 사고가 발생해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원고는 제품 결함을 이유로 피고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법원은 배선 결함이 신체 및 재산 안전에 대한 불합리한 위험을 구성한다고 판단하고, 보증기간이 경과했다 하더라도 사업자는 제품 결함에 대한 제조물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용했다.


핵심 법리 — 보증기간은 '무상 수리 기간'일 뿐

중국 법원이 이 사건에서 확립한 원칙은 단순하고 강력하다. 보증기간(Warranty Period)은 제조사가 무상으로 수리·교환을 제공하는 기간에 불과하며, 그 기간의 만료가 제조물 책임(Product Liability)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제품질량법(Product Quality Law)에 따르면, 제품에 인체 건강이나 재산 안전을 위협하는 '불합리한 위험'이 존재하는 경우 해당 제품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합리한 위험'의 존재 여부는 통상 법원이 개별 사안별로 판단하며, 일반적으로 소비자 기대 기준(consumer expectation test)을 적용한다.

원고는 제품 결함, 손해, 그리고 양자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기본 증명책임을 부담한다. 다만 복잡한 기술 공정이 수반된 제품의 경우, 법원은 원고 측의 증명 기준을 낮출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관건은 화재 원인이 '내재적 결함(Hidden Defect)'으로 판정되었다는 점이다. 생산 당시부터 존재했던 배선 설계·제작상의 결함이 16개월 후 발현된 것이므로, 보증기간 경과라는 방어 논리는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의 제품 관련 규제 및 법원 판결 경향

중국 제품질량법은 제조사와 판매자 모두에게 소멸시효를 적용한다. 원칙적으로 청구는 결함이 발견되었거나 발견될 수 있었던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제기되어야 하며, 제품이 최초 소비자에게 인도된 날로부터 10년을 초과할 수 없다.

중국 법원이 자동차 제품 책임 분쟁에서 처리하는 사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차량 화재 사건이다. 화재 피해가 다른 재산까지 미치지 않고 해당 제품에만 국한된 경우에도, 제조사가 명시적으로 제품질량법 제43조를 방어 논거로 제시하더라도 중국 법원이 이를 인용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품질 문제가 차량 안전과 관련된 경우, 안전 사고가 실제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인민법원은 해당 분쟁을 제조물 책임 분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사업자와 소비자 간에 합의된 반품·교환·수리 보증기간은 법정 기준보다 짧을 수 없다. 사업자가 교체 의무를 이행한 경우 보증기간은 교체 완료일로부터 다시 기산된다.


대중국 수출업체에 대한 경고

이번 최고인민법원의 전형 사례 공개는 단순한 판결 소개가 아니다. 중국 전역의 하급법원에 판결 기준을 제시하는 사실상의 지침이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 제조사가 중국 시장에 기계류, 전자제품, 농기계 등 내구재를 수출할 때 반드시 인지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보증기간을 방패로 삼을 수 없다. 12개월 보증이 만료되었다는 사실은 중국 법원에서 제조물 책임 면탈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제품 자체에 내재한 결함이 사후에 발현된 것임이 입증되면, 그 시점이 언제든 제조사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품질 관리 문서화가 최선의 방어다. 제조 당시의 품질 검사 기록, 부품 사양서, 안전 인증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해야 한다. 법원에서 '결함이 생산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데 이 자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중국 법원과 중재기관은 통상 직접 손해(환불, 수리 또는 교체)로 배상 범위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유럽 법원 수준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대규모 배상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이는 역으로 피해자가 소송을 쉽게 제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입 장벽이 낮고, 기술 감정 절차가 법원 주도로 진행되므로 제조사 입장에서 부담이 크다.

제품 책임 보험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중국에서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로부터 회사를 보호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적절한 보험을 확보하는 것이다. 보험료는 중국과의 거래 비용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보증기간이 지났다고 안심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중국 시장은 지금 그 경고를 판결로 명문화하고 있다.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아피 파마 어린이 기침약 참사: 리스크 거버넌스의 구조적 실패

200명 어린이의 죽음은 한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 제약사에 보내는 구조적 경고이기도 하다. 이 경고를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는 기업은, 다음 참사의 주역이 될 가능성을 스스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I. 사건의 개요

2022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집단 소아 사망 사건은, 단순한 의약품 사고가 아니라 제약 산업의 공급망 거버넌스 전반이 어떻게 붕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참사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최소 195명의 어린이가 에틸렌글리콜(EG) 및 디에틸렌글리콜(DEG)로 오염된 기침·해열 시럽을 복용한 후 급성 신장 손상으로 사망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5세 미만의 영유아였으며, 이 수치는 단일 의약품 오염 사고로는 현대 제약사에서 유례가 드문 규모에 해당한다.

사건의 지리적 파장 또한 인도네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다. 에틸렌글리콜 오염 시럽으로 인한 소아 사망 사건은 1990년대부터 아르헨티나, 방글라데시, 인도,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해왔으며, 이번 인도네시아 사건은 감비아, 우즈베키스탄 사건과 맞물려 WHO의 글로벌 경고 발령을 촉발하였다. 의약품 공급망의 취약성은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제약 생태계가 공유하는 구조적 리스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22년 10월 의약품 시럽 문제가 불거지자 전국의 모든 액상 의약품 판매를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초강경 조치를 내렸다. 법적 귀결로는, CEO 아리에프 프라세티야 하라합(Arief Prasetya Harahap)을 포함한 아피 파마 임원 4명이 징역 2년 및 10억 인도네시아 루피아(약 6만 3천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자카르타 중앙법원은 아피 파마와 원료 공급업체 CV 사무데라(Samudera)의 공동 과실을 인정하고, 피해 가족에 대한 배상을 명령하였다.


II. 아피 파마: 중견 제약사의 민낯

아피 파마를 단순히 군소 불량 제조사로 규정하는 것은 이 사건의 본질을 오독하는 것이다. PT 아피파르마(PT AFIFARMA)는 1985년 인도네시아 동자바 주 케디리(Kediri)에 설립된 제약사로, 의약품·소비자 제품·한방 의약품을 포괄하는 다각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었다. cGMP(우수 의약품 제조 기준) 인증을 획득하였으며, 2014년 기준 98종의 의약품을 생산하였다.

겉으로는 정부 인증을 갖춘 중견 제약사였다. 인도네시아 국가사회보장 시스템(JKN)을 위한 생산 참여와 ASEAN 경제 공동체 시장 진출까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즉, 아피 파마는 규제의 레이더 밖에 있는 음지의 업체가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운영되던 기업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 사건을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게 만든다.


III. 거버넌스 붕괴의 해부학

사건의 인과관계는 인도네시아 법정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전 세계적인 의약품 등급 프로필렌글리콜(PG) 공급 부족이 발생한 2021년, 소규모 비누 원료 공급업체인 CV 사무데라는 산업용 에틸렌글리콜(EG)을 PG로 재포장해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위조의 방식이었다. CV 사무데라는 대형 화학사 다우 케미칼 태국(Dow Chemical Thailand)의 로고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EG 드럼통에 붙였고, 유통업체 CV 아누그라 페르다나 게밀랑(Anugerah Perdana Gemilang)은 실제 검사 없이 이 가짜 원료에 대한 성분 분석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아피 파마는 이 원료를 아무런 검증 없이 제품 생산에 투입하였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원료의 EG 함량이 최대 99%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WHO의 안전 기준치는 0.1%에 불과하다. 이 오염된 원료는 아피 파마의 기침 시럽 70개 배치 생산에 사용되었다.

거버넌스 실패의 핵심은 입고 검사 절차의 완전한 부재였다. 아피 파마는 2021년 EG 검사 결과 없이 제품을 등록하였으며, 법원은 규제 당국인 바단 POM(Badan POM) 역시 제품을 "무사려하게" 승인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기업과 규제기관 양자 모두 기본적인 원료 검증을 생략한 것이다.

규제 체계의 공백도 사태를 키웠다. 인도네시아에서 EG와 DEG의 허용 기준이 의약품 원료에 처음 도입된 것은 2020년의 일이었으며, 완제품에 대한 명시적 검사 의무는 2023년이 되어서야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법원은 규제 공백을 이유로 아피 파마의 책임을 경감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소비자 단체는 규제기관 BPOM을 상대로 엄격한 품질 검사 부재, 불량 시럽에 대한 취약한 감시, 필수 품질 검사 의무를 제약사 자체에 위임한 점 등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제도의 허점이 산업 전체의 자기규율 부재와 맞물렸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이 사건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IV. 교훈

이 사건에서 도출되는 교훈은 도덕적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제약 거버넌스의 설계 원칙으로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공급망 검증은 면책 불가의 자체 의무다. 납품 업체가 제출한 성분 분석서나 인증서를 수동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거버넌스가 아니다. CV 사무데라는 다우 케미칼 태국의 로고를 무단 도용해 위조 라벨을 제작하였고, 유통업체는 실제 검사 없이 허위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공급망의 어느 고리에서든 사기가 개입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자체 입고 검사(incoming material testing)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제약사의 비위임적 의무다.

원가 압박은 안전 기준을 대체할 수 없다. CV 사무데라의 CEO는 법정에서 단순히 "비용 절감을 위해" 재포장을 감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공급 부족과 원가 압박이 교차하는 국면에서, 대체 원료에 대한 검증 절차를 강화하기보다 비용 절감을 우선한 결과가 어디로 귀결되었는지를 이 사건은 명확히 보여준다.

규제 공백은 기업의 자기 기준을 높이라는 신호지, 낮추라는 허가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EG/DEG 기준이 완제품까지 확대 적용된 것은 202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안전한 제품을 만들 책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약사의 품질 기준은 규제 최저선을 상회하도록 자체 설계되어야 한다.

공급망 위기 국면에서 검증 강도는 더 높아야 한다. 2021년의 전 세계적인 의약품 등급 PG 공급 부족이 이 참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체 원료를 긴급 수배해야 하는 위기 상황은, 통상적인 검증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 정밀한 검증을 요하는 경보 신호다. 위기가 리스크를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은 공급망 관리의 기본 공리다.

거버넌스 실패의 대가는 기업 존속 자체를 위협한다. 아피 파마는 CEO를 포함한 임원이 형사 처벌을 받고, 민사 배상 명령을 받았으며, 브랜드 가치는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 제품 안전 거버넌스를 비용 항목으로 인식하는 기업은, 그 비용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를 훗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닫게 된다.


V. 결론

아피 파마 사건은 제약 산업의 특수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산업에서 품질 관리의 실패는 고객 불만이나 재무적 손실로 귀결된다. 그러나 제약 산업에서 원료 검증의 생략은 곧바로 인명 피해로 이어진다. cGMP 인증과 정부 등록 번호는 안전의 증명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최소 요건일 뿐이다. 그 최소 요건이 실제 운영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것, 그것이 제약 거버넌스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