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예고 없이 도래하여 일상의 균열을 파고든다. 알제리의 평온한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한 알베르 카뮈의 저작 《페스트》는 단순한 전염병의 기록을 넘어, 거대한 악과 대면한 인간 실존의 양태를 처절하리만큼 정교하게 해부한 수작이다. 2025년 가을, 문예출판사가 선보인 이 판본은 우리가 통과해온 팬데믹의 상흔 위에서 실존의 의미를 다시금 사유하게 하는 묵직한 이정표로 다가온다.
폐쇄된 도시와 적나라한 인간 군상
소설의 무대인 오랑은 페스트라는 불가항력적 재앙에 의해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다. 고립은 인간 본성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촉매제가 된다. 공포에 질려 신의 징벌을 설파하는 성직자 파늘루, 혼란을 틈타 부당한 이익을 취하며 재앙의 지속을 바라는 코타르,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탈출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방인 기자 랑베르에 이르기까지, 카뮈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파편화된 인간 군상의 심리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이 중 랑베르의 심리적 궤적은 작품이 지향하는 윤리적 지점을 선명하게 비춘다.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그는, 타인의 죽음이 일상이 된 비극적 현실을 목격하며 실존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그의 깨달음은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연대의 출발점이다. 이는 사적 욕망과 공적 책임 사이의 부조리한 긴장을 해소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는 숭고한 결단으로 승화된다.
반항하는 인간과 실존적 품격
카뮈는 페스트라는 절대적 악을 통해 인간의 무력함을 조명하면서도, 그 무력함 속에 잉태된 '반항'의 가능성을 예찬한다. 의사 리유와 의용 보건대를 결성한 타루는 승산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이들에게 반항이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고통에 무릎 꿇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성실함' 그 자체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허무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계에 끊임없이 저항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는 역동성을 지닌다. "인간에게는 경멸당할 것들보다도 찬양받을 것이 훨씬 더 많다"는 리유의 고백은, 죽음이라는 패배가 확정된 실존의 전장에서도 끝내 잃지 말아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뢰를 상징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전후 유럽의 상실감을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변함없는 울림을 전한다.
팬데믹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유산
코로나19라는 현대적 재앙의 종언을 선언한 지금, 《페스트》는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텍스트로 치환된다. 바이러스의 위협은 잦아들었으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혐오와 무관심, 정보의 과잉이라는 변종 페스트에 노출되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수치화된 통계로 치부하거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성벽을 쌓는 행태는, 카뮈가 경계했던 정신적 죽음과 다름없다.
결국 이 소설은 재앙의 기록인 동시에 사랑과 연대의 증언이다.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를 성찰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명하며,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연대할 때 비로소 인간은 품격 있는 실존을 완성할 수 있다. 카뮈가 문학으로 남긴 이 강렬한 윤리적 유산은,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왜 인간으로 남아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명징한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