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2025년 12월 5일 『2025 중대재해 사고백서 — 실천만이 위험을 막는다』를 발간했습니다. 백서는 대규모·반복 사고, 주요 의무별 위반 사례, 사고 다발 위험요인의 3부로 구성되며, 각 사례를 감독관·동료·전문가의 시각에서 재구성하여 기술적 원인뿐 아니라 조직·관리적 원인까지 추적합니다.
백서가 부록으로 수록한 2024년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는 589명(553건)입니다. 이 가운데 건설업이 276명으로 47%를 차지하며, 건설업 사망자의 65.6%(181명)가 공사금액 50억 원 미만 현장에서, 57.6%(159명)가 떨어짐 사고로 발생했습니다.
본 글은 백서의 사례 중 건설사업자에게 시사점이 큰 네 건을 추려 사실관계를 간결히 정리하고, 이를 리스크 관리의 언어로 다시 읽어 봅니다. 백서의 원칙에 따라 업체와 인물은 모두 익명으로 표기합니다.
I. 리튬 1차 전지 공장 폭발·화재 — 무시된 전조(前兆)
2024년 6월 24일 오전 10시 30분경, 경기도의 한 리튬 1차 전지 제조공장 3동 2층에 적재된 전지 트레이에서 불꽃이 일었습니다. 연기가 작업장을 채우기까지 40초 남짓이 걸렸고, 이 사고로 23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했습니다.
백서가 짚은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8개월 동안 일하면서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대피 매뉴얼도 본 적이 없어요.” — 생존 작업자
백서는 같은 업종 선두 기업의 사례를 대비시킵니다. 2017년 공장 전소를 겪은 이 기업은 재건 과정에서 안정화 공정을 별도 공간으로 분리하고, 전지 보관 구역에 콘크리트 격벽을 두었으며, 출입구 외 비상구를 2~3곳 확보했습니다.
리스크 관점: 이 사고의 본질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고'가 아니라 '이미 관측된 손실 데이터가 의사결정에 반영되지 않은 사고'입니다. 반복된 소규모 폭발은 그 자체로 손실 빈도 정보였고, 동시 근무 인원 42명이라는 집적(Accumulation) 조건은 PML 산정의 핵심 변수였습니다. 아차사고와 경미 사고의 기록은 기업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언더라이팅 자료입니다.
II. 물류창고 신축현장 고소작업대 끼임 — 공정 간섭(Interface)의 사각지대
2023년 3월 21일, 수도권의 한 냉장·냉동 물류창고 신축현장(공사금액 약 500억 원)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내부 설비 공정에 8개 수급업체가 동시에 투입되어 있었고, 전체 공사금액의 95.54%가 하도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철골 업체가 방화벽 골조인 하지 철물을 먼저 설치하면서 고소작업대의 이동 경로가 막혔습니다. 하지 철물 1단 높이는 2.5m, 고소작업대 안전난간 높이는 2.36m였습니다. 작업자들은 과상승 방지봉을 제거하고 14cm의 여유로 철물 아래를 통과했습니다. 신호수 한 명이 장비 두 대를 맡던 중, 탑승한 채 이동하던 작업자의 머리가 하지 철물과 안전난간 사이에 끼었습니다.
"공정회의를 하면서 이 작업 누가 먼저 하고, 나중에 할거냐? 라는 논의는 하면서 이 과정에 위험이 있냐? 안전하냐? 라는 논의는 없었습니다." — 산업안전보건감독관
현장에는 위험성평가표와 작업계획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독관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업체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 이름만 바꿔 쓴 것이었고, 오타까지 똑같았습니다." 사고 후 하지 철물의 높이는 4m로 조정되었고 공사는 재개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원도급사 대표이사는 안전보건이사(CSO)가 중대재해처벌법상 경영책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감독관은 안전관리 예산 결정권이 대표이사에게 있다는 점을 확인했고,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리스크 관점: 단일 공종의 위험성평가로는 포착되지 않는 위험이 공종 간 경계에서 발생했습니다. 내부 마감 단계의 동시 작업에서는 선·후행 조율이 곧 위험 통제이며, 이는 원도급사의 고유 역할입니다. 보험 설계에서도 같은 경계가 존재합니다. 하수급인 근로자가 원도급사 근재보험의 피보험자 범위에 포함되는지, CGL의 교차배상책임(Cross Liability) 조항이 수급업체 간 상호 청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동일한 사고의 보상 경로가 달라집니다. 또한 경영책임자 지위를 둘러싼 다툼은 형식적 직함이 아니라 실질적 권한으로 판단되므로, 임원배상책임보험(D&O)의 피보험자 정의와 방어비용 담보가 실제 의사결정 구조와 일치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III. 이동식 비계 1m 추락 — 저심도로 보이는 고심도 위험
백서 3부는 이동식 비계 사고 두 건을 나란히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2024년 2월 15일, 경기도의 한 중학교 화장실 개선공사입니다. 발판 높이는 바닥에서 약 1m였고, 안전난간 없이 가새를 난간 삼아 작업했습니다. 작업자는 안전모를 쓰지 않은 채 추락했고, 괜찮다며 숙소로 돌아갔다가 오후 작업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뇌출혈로 숨졌습니다. 그날 TBM은 없었고, 현장소장은 자리를 비웠으며, 작업자들은 사고를 보고할 책임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2023년 7월 11일, 경기도의 한 주택 인테리어 현장입니다. 칠순의 내장 목공은 천장 높이(2.96m)에 맞추기 위해 이동식 비계를 거꾸로 세워 발판 높이 1.26m에서 작업했습니다. 거꾸로 세운 비계에는 안전난간을 설치할 수 없었습니다. 전임자가 시작한 방식이었고, 제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발판 위를 이동하다 떨어져 사흘 뒤 숨졌습니다.
리스크 관점: ‘1m’라는 수치는 위험을 과소평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손실 심도는 높이가 아니라 보호구와 방호시설의 유무가 결정합니다. 소규모 현장일수록 관리감독자의 부재가 곧 통제 공백이 되며, 사고 직후의 대응, 즉 의료 조치와 사고 통지, 기록 보존이 손실 규모를 좌우합니다. 사고 통지 절차가 현장 단위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클레임 대응의 출발점부터 흔들립니다.
IV. 교훈으로 삼을 다섯 가지
맺으며
백서의 부제는 "실천만이 위험을 막는다"입니다. 네 개의 사례가 공통으로 보여 주는 것은 위험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던 위험이 의사결정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해 손실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리스크 관리는 그 테이블을 만드는 일이며, 예방과 재무적 대응은 같은 테이블 위에서 함께 설계될 때 비로소 완결됩니다.
※ 백서는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되었으며,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나 사법적 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출처: 고용노동부·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2025 중대재해 사고백서 — 실천만이 위험을 막는다』(2025.12.5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