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칼리 피오리나가 남긴 것: 리더의 오만은 소통을 차단한다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의 HP 재임기는 위대했던 한 기업이 '엔지니어링의 자부심'을 잃고 '마케팅과 재무의 논리'에 잠식당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잔혹한 대서사시다. 그녀의 서사는 단순히 한 여성 경영인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 기업의 정체성과 리더십의 지향점이 충돌했을 때 발생하는 파멸적 에너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화려한 구원투수의 등장과 파격적인 혁신

1999년, 휴렛팩커드(HP)는 창사 이래 최대의 정체기에 빠져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원조라는 명성은 퇴색되었고, 조직은 거대한 관료주의의 늪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이사회가 선택한 카드는 AT&T와 루슨트 테크놀로지에서 '영업의 여제'로 불리던 칼리 피오리나였다.

그녀의 부임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외부 출신이자 여성, 그리고 엔지니어가 아닌 영업·마케팅 전문가라는 배경은 보수적인 HP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피오리나는 부임 직후 "HP는 다시 발명한다(Invent)"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하며, 파편화된 80여 개의 사업부를 통합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현대화했다. 그녀의 화려한 카리스마와 언변은 월스트리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며, HP는 다시금 혁신의 중심에 선 것처럼 보였다.

운명을 건 도박: 컴팩(Compaq) 합병의 명과 암

피오리나 경영의 정점은 2002년 단행된 컴팩 합병이었다. 이는 당시 IT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으로, HP의 운명을 결정짓는 승부수였다.

  • 전략적 당위성과 규모의 경제: 피오리나는 PC 시장이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규모의 경제'를 통한 가격 경쟁력 싸움으로 변모할 것임을 예견했다. 그녀는 컴팩을 인수함으로써 델(Dell)에 대적할 수 있는 거대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했다.

  • 창업주 가문과의 전쟁: 이 과정에서 창업주 월터 휴렛을 포함한 대주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피오리나는 자신의 자리를 걸고 위임장 대결까지 가는 사투 끝에 합병을 성사시켰다. 이는 그녀의 강력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대목이었으나, 동시에 조직 내부에 깊은 감정적 골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실패의 근원: 'HP 웨이'의 붕괴와 인간 소외

피오리나의 진정한 실패는 합병 이후의 통합 과정(PMI)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효율성을 위해 HP의 가장 고귀한 자산인 '사람'과 '문화'를 희생시켰다.

  1. 엔지니어링 자부심의 거세

    HP에는 엔지니어를 존중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는 'HP 웨이(HP Way)'라는 독보적인 문화적 토양이 있었다. 피오리나는 이를 '비효율적인 구시대의 유산'으로 규정했다. 그녀는 하향식(Top-down) 통제를 강화하고, 성과 지표에 기반한 가혹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수만 명의 직원이 해고되었고, 남아있는 엔지니어들은 기술적 성취감 대신 실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보잉의 칼훈이 안전과 엔지니어링을 재무적 목표 아래 두었던 것과 소름 끼칠 정도로 흡사한 전개였다.

  2. 혁신의 부재와 유통 기업으로의 전락

    규모는 커졌으나 내실은 허약해졌다. 합병된 HP는 거대한 하드웨어 유통 공룡이 되었을 뿐, 세상을 바꿀 파괴적 혁신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R&D 예산은 효율화라는 명목하에 삭감되거나 분산되었고, 우수한 인재들은 구글과 애플로 떠나갔다. 결국 주가는 부임 당시 대비 50% 이상 폭락했으며, 주주들은 그녀의 화려한 미사여구 뒤에 가려진 초라한 성적표를 직시하게 되었다.

인사이트: 숫자가 보지 못한 것들

2005년 2월, 이사회는 그녀를 전격 해고했다. 그녀의 퇴장과 함께 주가가 급등했다는 사실은 경영자로서 그녀가 남긴 유산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서사가 남긴 인사이트는 명확하다.

  • 문화는 전략을 아침 식사로 먹는다: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아무리 훌륭한 전략(컴팩 합병)도 조직의 문화(HP 웨이)를 파괴하며 추진될 때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리더십은 조직의 뿌리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 마케팅은 실체를 이길 수 없다: 화려한 브랜드 재구축과 언론 노출은 단기적으로 시장을 속일 수 있지만, 제품의 본질적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기술 기업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 리더의 오만은 소통을 차단한다: 피오리나는 자신의 비전이 옳다는 확신에 매몰되어 현장의 경고음을 무시했다. 리더가 현장과 괴리되어 숫자와 지표에만 의존할 때, 기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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