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회, 지속가능성 규제의 속도 조절 승인: '숨 고르기'에 들어간 EU ESG 법안
유럽연합(EU)이 야심 차게 추진해 온 지속가능성 규제들이 기업들의 현실적인 이행 부담과 경제적 불확실성이라는 벽 앞에서 잠시 멈춰 섰습니다. 지난 2025년 4월 3일, 유럽의회는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과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의 시행을 연기하는 '스톱 더 클락(Stop-the-clock)' 지침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옴니버스 패키지'의 일환으로, 규제의 방향성은 유지하되 기업들이 변화에 적응할 실질적인 시간과 자원을 확보하도록 돕겠다는 전략적 판단입니다.
시행 연기 결정의 상세 배경
이번 연기 결정은 단순한 일정 조정을 넘어, 복잡한 정치·경제적 역학 관계와 기업의 현실적 고충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기업의 행정 부담 완화 요구: 코로나19 이후 지속된 경제 침체와 고금리 상황 속에서, 수만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관리해야 하는 CSRD와 공급망 전체를 감시해야 하는 CSDDD는 기업들에 과도한 비용과 인력 부담을 지워왔습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보고 의무를 25~35%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한 규제 단순화: 지난 2월 발표된 옴니버스 패키지는 적용 대상을 대폭 축소(상위 20% 대기업 중심)하고, 보고 항목을 간소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연기는 이러한 '완화된 기준'이 법적으로 확정되기 전에 기업들이 기존의 '어려운 기준'에 따라 보고를 시작하는 비효율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법적 확실성 제공: 폴란드 등 의장국과 주요 회원국들은 기업들이 규제의 불확실성 속에서 혼란을 겪지 않도록 명확한 타임라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시행을 1~2년 늦춤으로써 국가별 국내법 전환(Transposition)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의도도 큽니다.
주요 변경 일정 요약
이번 승인으로 인해 기업들이 준수해야 할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이 재편되었습니다.
| 구분 | 대상 기업 | 기존 일정 | 변경 일정 (2025년 4월 승인) |
| CSRD (보고) | 비상장 대기업 (Wave 2) | 2025 회계연도 기준 | 2027 회계연도 (2028년 보고) |
| 상장 중소기업 (Wave 3) | 2026 회계연도 기준 | 2028 회계연도 (2029년 보고) | |
| CSDDD (실사) | 직원 5000명 / 매출 15억€ 이상 | 2027년 7월 시행 | 2028년 7월 시행 |
| 직원 3000명 / 매출 9억€ 이상 | 2028년 7월 시행 | 2028년 7월 시행 (유지) |
기업 경영 및 시장에 주는 시사점
시행 연기가 규제의 '종말'이 아닌 '재설계'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적용 대상의 급격한 축소와 선택적 집중
옴니버스 패키지의 영향으로 CSRD 대상 기업이 약 80%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제 규제는 '모든 기업'이 아닌 '영향력이 큰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제외된 중소·중견기업들은 의무 공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대신, 대기업 고객사가 요구하는 '자발적 공시'나 '공급망 데이터 제공'에 집중해야 하는 실질적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2. 고품질 데이터 구축을 위한 '골든타임' 확보
보고 시점이 2년 유예되었다는 것은 준비를 멈추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유럽재무보고자문그룹(EFRAG)이 새로 내놓을 '간소화된 ESRS(유럽 지속가능성 보고 기준)'에 맞춰 사내 데이터 관리 체계를 더 정교하게 다듬을 기회입니다. 특히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등 글로벌 표준과의 상호운용성이 강화될 예정이므로, 통합 공시 대응력을 키우는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3. 공급망 관리의 전략적 유연성
CSDDD 시행이 1년 연기되면서 기업들은 직접적인 비즈니스 파트너(Tier 1) 중심의 실사 체계를 먼저 완비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습니다. 무리한 전체 공급망 조사보다는, 실질적인 인권·환경 리스크가 큰 핵심 협력사부터 단계적으로 관리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유효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EU 의회의 결정은 기업들에 규제 대응의 '숨구멍'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자와 고객사의 ESG 요구는 법적 시행일과 무관하게 지속될 것입니다. 확보된 추가 시간을 활용해 단순히 '법 준수'를 넘어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데이터로 증명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기업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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