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3일 일요일

상장회사의 대표이사들은 로펌의 밥인가

영풍-고려아연, 쿠팡, 하이브 사태가 던지는 질문


다른 점 같은 점

2026년 초, 유독 비슷한 패턴의 기사들이 연달아 터졌다. 영풍과 고려아연은 '이그니오 투자 배임'을 두고 주주대표소송 전쟁을 예고했고, 쿠팡은 3,370만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미국 현지 로펌들의 집단소송 표적이 됐다. 하이브는 민희진 전 대표를 상대로 주주 간 계약 위반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세 사건의 무대와 당사자는 달라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표이사 혹은 경영진이 법정 피고석에 앉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상장회사의 대표이사는 이제 로펌의 먹잇감이 된 건 아닐까?


무엇 때문에 제소하는가

주주대표소송 — 회사를 대신한 복수

주주대표소송은 회사가 스스로 이사의 책임을 묻지 않을 때 주주가 나서서 회사를 대신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도다. 이 소송에서 배상금이 인정되면 돈은 이사 개인이 아닌 회사로 귀속된다. 즉 이론적으로는 '회사와 전체 주주를 위한' 제도다.

영풍-고려아연 사건에서 영풍 측 주주들이 고려아연 이사진을 상대로 이 카드를 꺼내든 이유도 여기 있다. 이그니오 투자가 배임에 해당한다면, 그로 인해 회사가 입은 손해를 이사들이 직접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다. 표면상으로는 회사 이익을 위한 소송이지만, 현실에서는 경영권 분쟁의 연장전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법정이 지분 싸움의 또 다른 전장이 되는 것이다.

증권 집단소송 — 투자자 손실의 법제화

쿠팡 사건은 결이 다르다.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문제가 된 건, 쿠팡이 이를 SEC에 정정 공시한 이후에도 주가가 하락했다는 점이다. 미국 현지 로펌들이 즉각 소송에 뛰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의 증권 집단소송 시스템에서는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집단을 이뤄 기업과 경영진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로펌은 성공보수 구조로 수임하기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하는 비용을 투자자가 선지급할 필요가 없으니, 로펌 입장에서는 '소송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라면 먼저 달려가는 게 합리적이다.

주주 간 계약 위반 — 신뢰의 사법화

하이브가 민희진 전 대표를 상대로 낸 소송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핵심 쟁점은 '뉴진스 빼가기' 계획이 주주 간 계약을 위반했느냐였다. 법원은 중대한 위반이 없다고 판단해 민희진 측이 승소했지만, 이 소송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따로 있다. 경영진과 대주주 사이의 내밀한 신뢰 관계, 또는 그 균열이 이제 계약서와 법정을 통해 정산된다는 사실이다. 구두 합의와 암묵적 신뢰의 시대는 끝났다.


대리인 문제의 법정 이전

경영학에서 오래된 개념이 있다.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다. 주주(주인)와 경영진(대리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 대리인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할 유인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스톡옵션, 성과보수, 이사회 감시 같은 내부 거버넌스 장치였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다르다. 내부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않거나 지배주주 자신이 갈등의 당사자가 됐을 때, 주주들이 외부 수단, 즉 법원으로 직접 달려가고 있다. 주주대표소송과 집단소송은 사실상 외부화된 대리인 통제 메커니즘이다.

이것이 효율적인가? 단기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 소송 비용, 경영 불확실성, 핵심 인재의 이탈, 기업 이미지 훼손 등 부수적 피해가 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법적 책임의 위협이 경영진에게 주주 이익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억제하는 일종의 사전 억지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소송이 잦아질수록 경영진은 더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논리다.

그러나 여기에는 왜곡도 존재한다. 소송 리스크가 커질수록 경영진은 과감한 투자보다 무사안일한 의사결정을 선호하게 된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어적 경영이다. 고려아연 이그니오 투자가 배임인지 아닌지를 법원이 판단하게 됐을 때, 앞으로 다른 기업의 이사들이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투자를 얼마나 선뜻 결재하려 할까?


책임이란 무엇인가

이 소송들이 제기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경영의 실패는 도덕적 잘못인가, 아니면 불운인가?

배임죄의 핵심은 고의성이다. 결과가 나빴다고 해서 모두 배임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주주들은 손실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경영 판단의 실패로 귀결시키고, 법적 책임을 묻고 싶어 한다. 손실에는 반드시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이지만, 항상 공정한 귀인(attribution)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책임을 개인의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적 연결에서 찾았다. 그런데 대기업의 의사결정은 수백, 수천 명의 논의와 승인을 거친다. 대표이사 한 명이 '모든 것을 결정한 자'인가? 이 질문에 법원은 대부분 단순화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법은 복잡한 조직 현실을 개인의 책임으로 압축하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한편 로펌의 역할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분화된다. 로펌은 법의 집행자인가, 아니면 소송의 기획자인가? 미국에서 쿠팡을 향해 달려든 로펌들은 투자자 피해를 구제하는 정의의 수호자일 수도 있고, 집단소송 성공보수를 노린 수익 추구자일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은 동시에 옳다. 그리고 그 모호함 위에 현대 주주 소송의 생태계가 형성돼 있다.


법정 밖의 해답은 없을까

상장회사 대표이사가 로펌의 밥이 됐다는 표현은, 비유적으로는 틀리지 않다. 지배구조 갈등, 투자 실패, 계약 위반이 모두 법정으로 직행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나쁜 현상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책임 없는 경영이 방치됐던 시대보다는, 과도한 소송이 경영을 위축시키는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소송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소송이 거버넌스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고 주주와 경영진 사이에 신뢰와 소통이 살아있다면, 법정까지 가는 분쟁은 훨씬 줄어든다. 영풍과 고려아연이 법원 밖에서 합의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던 이유, 하이브와 민희진이 계약서 한 줄로 갈라선 이유를 생각해보면, 결국 이 소송들은 내부 거버넌스의 실패를 외부 사법 체계가 수습하고 있는 광경이다.

대표이사가 로펌의 밥이 되지 않으려면, 더 좋은 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더 좋은 이사회와 더 솔직한 주주 관계가 먼저다.


2026년 4월 29일 수요일

기후 인플레이션: 지구가 보내는 가격표

기후 변화를 환경 문제로만 바라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기후는 장바구니 물가를 직접 건드리는 경제 변수다. 학자들은 이를 '기후 인플레이션(Climateflation)'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중앙은행들은 이를 거시경제 리스크 분석 대상에 공식 편입했다. 조용히, 그러나 구조적으로, 지구는 우리에게 가격표를 내밀고 있다.


숫자가 먼저 말했다

2022년 유럽의 여름은 기록적이었다. 스페인은 46도의 폭염에 신음했고, 올리브 농장은 타들어 갔다. 영국에서는 폭염으로 닭 도축량이 9% 감소했다. 북이탈리아는 70년 만의 최악의 가뭄으로 쌀 수확이 급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기상 이변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의 기온 상승은 식품 물가를 연 0.7%포인트, 전체 소비자물가지수(CPI)를 0.3%포인트 끌어올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숫자는 냉정하다. 기후가 물가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데이터가 이미 증명했다.


25도라는 임계선

밀, 옥수수, 콩. 인류의 식탁을 지탱하는 주요 작물들은 평균 기온이 약 25도를 넘는 순간부터 생산성이 급격히 무너진다. 이 임계선은 단순한 농업 통계가 아니다. 지구 평균 기온이 조금씩 오를 때마다, 수확량 곡선은 반대 방향으로 꺾인다.

가뭄은 밭을 말리고, 해양 고온은 어장을 무너뜨리고, 폭풍은 수확 직전의 작물을 쓸어간다. 공급이 줄면 가격은 오른다. 경제학의 가장 오래된 법칙이, 기후라는 새로운 변수 앞에서 매년 반복되고 있다.


식품을 넘어, 전방위로 번지는 충격

기후 인플레이션의 파급은 식품에서 멈추지 않는다.

폭염이 오면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전기요금이 뛴다. 극단적 고온은 도로와 철로를 뒤틀어 물류 비용을 끌어올린다. 기후 재해가 반복될수록 보험사는 손실을 계산하고, 그 계산서는 보험료 인상이라는 형태로 기업과 가계에 전가된다.

이렇게 에너지, 물류, 보험이 동시에 오르면, 물가 압력은 특정 품목의 문제가 아닌 경제 전체의 구조적 비용 상승으로 전환된다. 기업의 원가 구조가 바뀌고, 그 변화는 결국 소비자 가격표에 새겨진다.


신흥국이 먼저 무너진다

기후 인플레이션의 충격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선진국 가계에서 식품이 차지하는 지출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신흥국과 저소득 국가에서는 식품이 소비 지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식품 가격이 오르면, 그 충격은 더 빠르고, 더 깊게 전달된다.

기후 변화는 지구적 현상이지만, 그 비용은 가장 취약한 곳에 가장 먼저, 가장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것이 기후 인플레이션이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한 이유다.


기대가 굳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중앙은행이 기후 인플레이션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후 충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물가는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임금 협상에서 더 높은 인상률을 요구하고, 기업은 미리 가격을 올린다. 이렇게 기대 인플레이션이 자리를 잡으면, 물가 상승은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자기 실현적 구조로 굳어진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미 기온 상승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공식 평가했다. 2035년까지 기후 요인만으로 CPI가 연 1.2%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통화정책의 전통적 도구로는 기후발 공급 충격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기업에게 기후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물가 문제가 아니다. 물류 우회 비용, 보험료 급등, 기후 노출 자산의 장기 손실 리스크가 원가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공급망을 다각화하고, 기후 리스크를 재무 모델에 반영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 됐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기후 인플레이션은 저축의 실질 가치를 갉아먹고, 생활비 부담을 구조적으로 끌어올린다. 단기적 재정 계획을 넘어, 기후 변수를 삶의 경제적 설계 안에 포함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기후 변화는 먼 미래의 환경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마트에서 집어 든 올리브유 가격에, 이번 달 전기요금 고지서에, 갱신된 보험 계약서에 이미 새겨져 있다. 지구는 오래전부터 가격표를 보내왔다. 우리가 이제야 그것을 읽기 시작했을 뿐이다.


2026년 4월 28일 화요일

2026년 1분기 북미 화물 절도 동향: 사칭 기반 조직범죄의 고도화

Insurance Journal의 2026년 4월 28일 자 보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미국과 캐나다 내 공급망 범죄 양상이 질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기간 발생한 화물 절도 사건은 총 767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 소폭 감소했으나, 추정 손실액은 약 1억 3,160만 달러 규모를 유지하며 건당 피해액은 오히려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지역별 발생 현황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범죄 다발 구역이었던 텍사스 및 남동부 지역의 활동은 위축된 반면, 주요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한 조직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255건→277건)와 뉴저지(27건→59건)의 사례에서 보듯, 물류 허브가 집중된 연안 지역의 치안 부담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품목별로는 개인 위생 및 뷰티 제품의 절도 사례가 18건에서 50건으로 세 배 가까이 급증했으며, 이는 북동부 지역 내 화장품과 향수의 높은 암시장 수요를 반영한다. 식음료 분야에서는 전반적인 음료 절도는 감소했으나, 해산물 등 고단가 식자재를 노린 표적 범죄는 오히려 크게 늘어났다.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범죄 수법의 지능화다. 단순 탈취를 넘어 피싱, 원격 트로이 목마, 합법 운송업체 사칭 등 ‘신원 도용’ 기반의 범죄가 핵심 유형으로 부상했다. 범죄 조직은 운송업체나 중개업체의 계정, 전화 시스템, 산업용 애플리케이션을 해킹해 합법적인 물류 프로세스에 침투하고 있다.

심지어 규제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합법적인 운송업체를 직접 인수하여 범죄의 교두보로 활용하는 치밀함까지 보이고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사칭 및 신원 악용 기반의 범죄가 향후 화물 절도 시장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될 것으로 전망하며, 물류 업계의 강력한 보안 인증 체계와 데이터 보호 전략이 시급함을 시사한다.

www.insurancejournal.com

과징금이 달라졌다 — 공정위, 담합의 값을 다시 매기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징금 부과 세부기준 등에 관한 고시」를 개정해 2026년 4월 30일부터 시행한다. 이번 개정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부과기준율 하한을 대폭 올렸다. 담합 적발 시 최소 부과기준율이 기존 0.5%에서 10%로, 중대한 담합은 3.0%에서 15%로 상향되며, 부당지원·사익편취의 경우 하한이 20%에서 100%로, 상한은 160%에서 300%로 올라 지원금액 전액 환수도 가능해진다. 다음으로 반복 위반에 대한 가중이 강화된다. 과거 5년 내 위반 전력 1회만으로도 최대 50%(기존 10%)까지 가중되고, 담합은 10년 내 전력이 있으면 최대 100%까지 가중된다. 마지막으로 감경 요소도 대폭 줄었다. 조사·심의 협조 감경 한도는 20%에서 10%로 축소되고, 자진시정 감경률은 최대 30%에서 10%로 낮아지며, 가벼운 과실에 의한 감경 규정은 아예 삭제된다. 공정위는 이번 개정을 통해 법 위반을 기업 전략으로 삼는 관행을 차단하고, 민생침해 담합을 근절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2026년 4월 25일 토요일

셸(Shell)은 왜 전 세계 법정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는가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 중 하나인 셸(Shell, LSE: SHEL)이 요즘 법정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나이지리아 — 대륙을 가리지 않고 7건 이상의 기후·환경 소송이 동시다발로 진행 중이다. 이 소송들은 단순히 한 기업을 겨냥한 법적 공방이 아니다. 화석연료 산업 전체의 미래, 그리고 우리가 기업의 책임을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시대적 질문이다.


1. 가장 중요한 소송 — 법정에서 기후 과학을 이긴 날

2021년 5월 26일, 네덜란드 헤이그 지방법원은 역사에 남을 판결을 내렸다. 환경단체 밀리우데펜시(Milieudefensie, Friends of the Earth 네덜란드)와 17,000명 이상의 시민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셸에게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45% 감축하라고 명령했다.

민간 기업에게 구체적인 탄소 감축 수치를 강제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원은 이렇게 밝혔다. "셸은 혼자서 이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셸이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개별적 부분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셸은 즉각 항소했고, 2024년 11월 헤이그 항소법원은 구체적인 45% 수치는 부과할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언론은 셸의 승리라 보도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항소법원은 중요한 단서를 달았다. "셸과 같은 대형 에너지 기업도 기후 보호 의무를 진다"는 원칙 자체는 인정한 것이다. 더 나아가, 새로운 유전에 대한 투자가 셸의 주의 의무와 충돌할 수 있다고 암시하기도 했다.

밀리우데펜시는 2025년 2월 네덜란드 대법원에 재상고했고, 5월에는 셸의 신규 유전 700개 개발 계획을 근거로 새 소송까지 준비 중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 이사진을 직접 법정에 세우려 했던 시도

2023년, 환경법 전문 NGO 클라이언트어스(ClientEarth)는 전례 없는 도전을 했다. 셸의 주주 자격으로 셸 이사회 전원을 피고로 하는 파생소송을 영국 고등법원에 제기한 것이다.

핵심 주장은 이랬다. 셸의 기후 전략이 워낙 허술해서, 이사들이 영국 회사법상 자신들에게 주어진 리스크 관리 의무(fiduciary duty)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셸의 당시 계획대로라면 2030년까지 순배출량이 고작 5%밖에 줄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NEST, 스웨덴 연금 AP3 등 기관투자자 1,200만 주 보유자들이 소송을 지지했다.

결과는 기각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남긴 메시지는 강렬하다. 기업 이사진이 기후 리스크를 소홀히 관리했다는 이유로 직접 법정에 서야 할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앞으로 유사한 소송이 더 많이 제기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30년 묵은 상처 — 나이지리아 오염의 진실

시간을 1995년으로 돌려보자. 나이지리아 군사정권이 환경운동가 켄 사로-와이와(Ken Saro-Wiwa)를 포함한 '오고니 9인(Ogoni Nine)'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들의 죄목은 셸의 니제르 삼각주 석유 개발에 반대한 것이었다.

사로-와이와 가족은 셸이 군에 물자와 정보를 지원하고 증인을 매수했다는 혐의로 1996년 미국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12년 뒤인 2009년, 셸은 1,550만 달러(약 200억 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숫자가 말해주었다.

오늘날 니제르 삼각주의 상황은 더 복잡하다. 오갈레와 빌레 공동체 주민 약 5만 명이 현재 런던 고등법원에서 셸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2011년 유엔환경계획(UNEP) 보고서가 밝힌 오갈레 지역의 지하수 벤젠 농도는 WHO 기준의 900배였다. 2025년 6월, 영국 법원은 셸의 절차적 항변을 기각하고 본안 심리로 나아갔다. 이 소송은 이제 본격적인 막이 오른 셈이다.


4. 광고 한 편이 불러온 나비효과

2022년, 셸은 친환경 이미지를 강조하는 TV·유튜브 광고를 방영했다. 풍력발전, 전기차 충전소, 미래 에너지 — 화면은 온통 녹색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셸 전체 투자의 약 68~70%는 여전히 석유·가스에 쏠려 있었다.

시민단체 '광고금지도시(Adfree Cities)'의 신고로 영국 광고표준청(ASA)은 조사에 나섰고, 2023년 6월 광고 방영 금지를 명령했다. 소비자들이 셸의 저탄소 활동 비중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셸은 2024년 광고에서는 투자 비중을 자막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꿨고, ASA는 이번엔 문제없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다. 셸의 실제 재생에너지 투자 비율은 13.3%인데, 광고에서는 23%라고 표기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린워싱은 이제 광고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리스크가 됐다. EU의 기업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이 본격 시행되면, 이 전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5. 모든 소송이 던지는 하나의 질문

이 7개의 소송을 관통하는 공통된 질문이 있다.

기업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후 위기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져야 하는가?

10년 전이라면 황당한 소리로 들렸을 이 질문이, 이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법학자들이 진지하게 다투는 법정의 쟁점이 됐다. 그리고 법원들은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그렇다"는 방향으로 답을 내놓고 있다.

2021년 네덜란드 판결은 파기됐지만, 항소법원조차 "셸은 기후 보호 의무를 진다"는 원칙은 인정했다. 나이지리아 오염 소송은 다국적 기업이 해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본국에서 책임질 수 있다는 판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사회 소송은 기각됐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이미 기후 리스크를 주주가치와 직접 연결해서 보기 시작했다.


6. 투자자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첫째, 소송 비용은 빙산의 일각이다. 직접적인 벌금이나 합의금보다, 불확실성이 기업 가치에 미치는 할인 효과가 더 크다. 소송이 장기화될수록 셸의 신규 사업 투자 결정이 불확실해지고, 이는 중장기 수익성에 영향을 준다.

둘째, 규제 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EU CSRD, 영국 회사법 해석 변화, 각국 기후 소송 판결 축적 — 이 모든 것이 에너지 기업의 영업 환경을 재편하고 있다. 셸이 오늘 짜는 사업 계획이 5년 후에도 유효하다는 보장이 없다.

셋째, 에너지 전환의 속도가 관건이다. 셸이 재생에너지 투자를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빠르게 늘리느냐가 향후 소송 리스크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광고로 이미지를 관리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마치며

셸의 기후 소송 사례들은 ESG가 단순한 마케팅 용어가 아님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환경·사회·지배구조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기업은 어느 날 갑자기 법정에 서게 될 수 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지구 반 바퀴를 돌아다니며 동시에.

셸이 지금 법정에서 어떤 답을 내놓느냐는, 앞으로 수십 개의 에너지 기업들이 따라가야 할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본 포스트는 공개된 법원 자료, 환경 단체 보고서,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투자 조언이 아니며, 구체적인 투자 판단은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Milieudefensie, ClientEarth, Corporate Accountability Lab, Amnesty International, ASA, Climate Case Chart (Columbia Law Sch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