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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영국 CMA의 그린워싱 규제, 이제 공급망 전체가 타깃이다

수출기업이 반드시 알아야 할 2024년 환경 주장 규제의 핵심


"친환경", "재활용 가능", "탄소중립"

이 세 단어가 이제 기업에게 **전 세계 매출의 10%**를 날릴 수 있는 폭탄이 됐다.

2026년, 영국 경쟁시장청(CMA, Competition and Markets Authority)이 그린워싱(Greenwashing) 규제의 칼날을 대폭 강화했다. 변화의 핵심은 단 하나다. 책임의 범위가 브랜드에서 공급망 전체로 확대됐다.

한국 수출기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영국 또는 EU 시장에 제품을 납품하거나 유통하는 순간, 이 규제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


공급망 전체가 책임진다

기존에는 "우리는 제조사에서 받은 정보를 그대로 표기했을 뿐"이라는 해명이 어느 정도 통했다.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CMA 가이드라인은 환경 관련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원료 → 제조 → 유통 → 소매 → 브랜드로 이어지는 공급망 전 단계에 부과한다. 즉, 한국의 원료 공급사, 국내 제조사, 현지 유통업체, 그리고 최종 브랜드까지 모두 규제 대상이 된다.

규제 대상이 되는 표현도 단순한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지, 로고, 색상, 심지어 소비자에게 친환경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정보의 '생략' 까지도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 녹색 잎사귀 이미지 하나, "자연에서 온" 같은 문구 하나가 입증 자료 없이는 법적 리스크가 된다.


"검증 못 하면 쓰지 마라" — 입증 의무의 핵심

이번 규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명확하다.

모든 환경 주장은 기업 스스로 근거를 확보하고 문서화해야 한다.

공급업체가 "친환경 소재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혹은 제3자 인증서 하나를 받았다고 해서 의무가 끝나지 않는다. CMA는 이를 명시적으로 불충분하다고 규정한다.

기업이 스스로 다음을 해야 한다:

  • 환경 주장에 대한 과학적·통계적 근거 확보
  • 해당 근거의 문서화 및 내부 보관
  • 근거가 없거나 부족할 경우 주장 수정 또는 철회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면 제품 판매 자체가 법적 리스크가 된다. 규제 당국의 조사가 시작됐을 때 "몰랐다"는 변명은 더 이상 방어 논리가 되지 않는다.


과징금: 전 세계 매출의 최대 10%

숫자를 보면 이 규제가 얼마나 강력한지 실감할 수 있다.

2024년 제정된 법에 따라, 허위 또는 오해를 유발하는 환경 주장을 한 기업에는 다음 중 큰 금액이 과징금으로 부과된다:

  • 전 세계 연간 매출의 최대 10%
  • 30만 파운드(약 5억 원)

그리고 치명적인 조항이 있다. 고의성이 없어도 위반으로 간주된다. 담당자가 몰랐다고, 실수였다고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소비자와 직접 접점이 있는 유통업체와 브랜드 기업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구조다. 한국 기업이 OEM·ODM 방식으로 납품하더라도, 제품에 환경 관련 표기가 들어간 순간 리스크를 완전히 외면하기 어렵다.


유통사도, 브랜드도 모두 제재 대상

책임 소재를 두고 "우리 잘못이 아니라 거래처 잘못"이라며 서로 미루는 상황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CMA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빨리 시정할 수 있는 주체를 중심으로 제재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 브랜드가 잘못된 환경 표시를 수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통업체가 판매를 계속했다면, 양측 모두 제재 대상이 된다.

거래 계약서에 환경 관련 책임 조항이 없다면, 지금 당장 검토가 필요하다.


글로벌 규제의 방향은 동일하다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EU: 그린 클레임 지침(Green Claims Directive) 추진 중
  • 미국 FTC: 친환경 마케팅 가이드라인 강화
  • 호주, 싱가포르, 한국: 환경 주장 입증 책임 강화 흐름 합류

다국적 기업, 그리고 다국적 시장에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이라면 국가별 차이를 파악하되, 가장 엄격한 기준에 맞춘 통합 검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이다. 시장마다 다른 기준을 개별 대응하는 전략은 비용과 리스크 양쪽에서 비효율적이다.


수출기업이 지금 해야 할 것

이번 규제 강화는 마케팅 문구 몇 개를 고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과 공급망 관리 전반을 재설계하도록 압박하는 구조적 변화다.

지금 당장 점검해야 할 사항:

  1. 자사 제품에 환경 관련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가? (문구, 이미지, 로고, 색상 포함)
  2. 해당 표현을 뒷받침하는 검증 자료가 문서화되어 있는가?
  3. 공급업체로부터 받은 환경 관련 주장을 자체 검증했는가?
  4. 유통·판매 계약서에 환경 표시 관련 책임 조항이 명시되어 있는가?
  5. 수출 대상국의 그린워싱 규제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가?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대응이 필요하다.


그린워싱 규제는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기업 생존과 직결된 법적 리스크다. 영국 CMA의 이번 가이드라인은 그 시작점에 불과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수출기업이라면, 환경 주장에 대한 검증 체계를 지금 구축해야 한다.


본 포스팅은 영국 CMA 그린워싱 가이드라인 및 관련 규제 동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26년 4월 3일 금요일

글로벌 분유 리콜 사태 분석: 공급망이 곧 안전

사태의 시작 — 독소 하나가 글로벌 시장을 흔들다

2026년 초, 영유아 분유 시장에 대규모 충격파가 덮쳤다. 네슬레, 다논, 락탈리스 같은 세계 최대 식품 기업들이 줄줄이 분유를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콜의 직접 원인은 '세레울리드(Cereulide)'라는 독소. 바실러스 세레우스(Bacillus cereus) 박테리아에서 유래된 이 독소는 구토와 메스꺼움뿐 아니라 패혈증, 심각한 간 손상, 뇌농양 등 중증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프랑스 공중보건청은 세레울라이드가 프랑스 집단 식중독 원인의 약 25%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독소 그 자체가 아니라 독소의 경로였다. 분유에는 모유와 비슷한 영양 성분을 구현하기 위해 오메가-6 계열 불포화지방산인 아라키돈산(ARA)이 사용된다. 문제가 된 분유 속 아라키돈산은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 하나의 중국산 원료 공급업체에서 시작된 오염이 여러 국가, 여러 브랜드, 수십 개 제품으로 동시에 번져나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세레울리드가 열에 강해 제조·가공 과정에서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분유 제조사들은 가루 상태의 분유를 기준으로 안전 검사를 시행해 왔는데, 추가 검사를 통해 물과 섞었을 때 독성 농도가 높아지는 것이 발견됐다. 수십 년간 업계 전체가 잘못된 검사 기준 위에서 제품을 출하해 온 셈이다.


리콜의 핵심 원인 — 효율을 추구한 글로벌 공급망의 역습

이번 사태는 단순한 품질 불량 사고가 아니다. 구조적 문제의 폭발이다.

글로벌 식품 기업들은 수십 년간 비용 효율을 최우선으로 공급망을 설계해 왔다. 특정 원료를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는 곳에서 대량 조달하는 방식. 아라키돈산의 경우, 중국의 특정 공급업체 카비오 바이오텍(Cabio Biotech)이 다수 글로벌 기업에 원료를 납품하는 구조였다. 프랑스 아동건강단체인 칠드런스헬스는 카비오 바이오텍을 지목하며, 정부에 이 회사가 생산한 아라키돈산이 함유된 모든 분유를 회수하도록 명령할 것을 요청했다. 카비오 바이오텍은 아라키돈산 오염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나의 공급처가 오염되자, 그 원료를 사용한 모든 브랜드가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 공급망 집중화가 리스크 집중화로 이어진 전형적인 사례다.

대책 측면에서는 세 가지 방향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첫째, 세레울리드에 대한 국제 통일 허용 기준 수립이다. 현재 글로벌 기준에서 세레울리드에 대해 합의된 안전 허용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거나 아예 없는 상태다. 둘째, 완제품 상태뿐 아니라 물에 혼합한 상태에서의 독소 농도를 측정하는 검사 방식 전환이다. 셋째, 핵심 원료의 공급업체 다변화와 리스크 분산으로, 단일 공급처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근본적 해법으로 지목된다.


리콜한 기업들 — 같은 원인, 다른 대응

네슬레는 이번 사태의 트리거 역할을 한 기업이자, 가장 빠르게 움직인 기업이기도 하다. 고도화된 자체 검사 프로토콜을 통해 유럽의 한 생산 시설에서 제조된 일부 배치에서 극미량의 세레울리드 존재 가능성을 업계 최초로 감지했고, 심층 조사 결과 글로벌 업계 공급업체로부터 공급된 특정 아라키돈산 오일의 오염이 원인임을 확인했다. 네슬레가 제공한 정보는 타 제조사들이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문제를 발견하고 리콜을 발표하는 데 11일이 걸렸다는 점에서 늦장 대응 논란도 피하지 못했지만, 업계 최초 발견자로서 정보 공개를 주도한 점은 달리 평가할 부분이다. ARA 오일 공급망은 글로벌 공급업체(중국산 포함)에 의존했고, 리콜은 60개국 이상으로 확대됐다. 자체 내부 품질 기준은 EFSA 가이드라인 기반의 '검출 불가' 수준으로 규제 기준보다 엄격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락탈리스는 피코(Picot) 브랜드 분유를 리콜했다. 락탈리스는 피코 분유 일부 제품을 프랑스뿐 아니라 중국, 호주, 멕시코 등에서 리콜한다고 발표했으며, 리콜은 판매된 18개국에서 모두 진행됐다. 프랑스 농림부 산하 식품총국은 16일에 락탈리스 분유에서 독소가 발견됐다고 인지했고, 리콜 조치 발표까지 5일이 걸렸다. 네슬레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중국산 ARA 오일을 조달했으며, 당국의 통보 이후에야 수동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리스크 거버넌스 측면에서 규제 기준 추종형에 가까웠다. 2017년 살모넬라균 분유 사태 당시에도 늑장 대응 논란이 있었던 만큼 소비자 신뢰 회복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논은 압타밀(Aptamil) 등 자사 분유 브랜드를 통해 피해가 확산됐다. 싱가포르 식품청이 다논의 태국산 듀맥스 둘락 1의 예방적 리콜을 명령한 데 이어, 아일랜드 식품안전청도 다논이 아일랜드에서 제조된 특정 배치의 영아용 분유 및 성장기용 분유를 대상으로 리콜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리콜의 원인 역시 중국에서 제조된 ARA 오일 원료가 세레울라이드에 오염됐을 가능성이었다. 다논 역시 당국 명령 이후 이행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리스크 거버넌스 구조는 락탈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 기업 모두 글로벌 중국산 ARA 오일 공급망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차이는 문제 인지 후 공개까지의 속도, 정보 투명성, 소비자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갈렸다. 네슬레가 선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리콜을 주도했다면, 락탈리스와 다논은 당국의 발표가 나온 뒤에야 리콜에 나서는 수동적 태도를 보였다.


리콜하지 않은 기업 — 힙(HiPP)의 공급망 철학

이번 사태에서 가장 주목받은 브랜드 중 하나가 독일의 유기농 영유아식 기업 힙(HiPP)이다.

힙은 리콜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이다. 힙분유는 유럽 내 6,000개 이상의 유기농 농가와 직접 계약을 맺고 원료를 공급받는 생산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원료 시장에 의존하기보다 유럽 농가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급망을 설계한 구조다. 중국산 ARA 오일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오염 경로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방식은 단기적인 효율성만 놓고 보면 가장 경제적인 모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료 조달 비용이 더 높고, 공급 규모 확장도 제한된다. 그러나 위기 국면에서 이 '비효율'이 최강의 방어막이 됐다. 힙의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급망 설계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리스크 철학의 문제다. 영유아 식품처럼 한 번의 사고가 브랜드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산업에서, 공급망 단순화와 독립성 확보는 보험이자 경쟁력이다.


인사이트 — 이 사태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첫째, 효율성과 안전성은 공존 가능한가. 글로벌 식품 산업은 수십 년간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 왔다. 원료를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는 곳에서 대량 구매하고, 생산을 집중화하며 비용을 낮췄다. 이번 사태는 그 방정식의 이면을 보여줬다. 공급망이 복잡해질수록 특정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가 전체 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커진다. 영유아 분유처럼 신뢰가 핵심인 산업에서는 효율 추구가 곧 잠재 리스크의 누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검사 기준은 충분한가. 분유 완제품(분말) 상태에서는 위험한 수준의 세레울리드가 발견되지 않지만, 추가 검사를 통해 물과 섞었을 때 독성 농도가 높아지는 것이 발견됐다. 기존의 모든 안전 기준이 '가루 상태'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었다는 의미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기준 자체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사태는 정면으로 보여줬다.

셋째, 리콜 자체가 신뢰 자산이 될 수 있는가. 네슬레는 실제 피해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상태에서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먼저 정보를 공개하고, 먼저 리콜을 단행했다. 이번 해외 리콜은 실제 위해 사례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잠재적 가능성에 대비한 예방적 조치였다. 단기적으로는 막대한 비용과 브랜드 타격을 감수해야 했지만, 장기적으로 '문제를 먼저 찾아낸 기업'이라는 서사는 신뢰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반대로, 당국의 통보를 기다렸다가 리콜에 나선 기업들은 '숨기려 했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결국 이번 사태의 핵심 교훈은 하나로 수렴된다. 식품 안전은 제품의 마지막 단계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원료를 어디서, 어떻게 조달하는지, 즉 공급망 설계의 철학이 안전의 출발점이다.


2026년 3월 28일 토요일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 숫자로 보는 제품결함 리스크

미국의 제조물책임 소송 시장 규모는 연간 수백억 달러다. RAND Corporation 추산 기준, 미국 전체 불법행위 소송 비용 중 제조물책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GDP의 약 2%에 육박한다. 그리고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부담한다. 2026년 3월 현재 ClassAction.org에 등재된 제품결함 집단소송 7건은 그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 유아용품: 리콜 발표 = 결함 인지 증거

2025년 11월, ByHeart는 Whole Nutrition 유아용 조제분유에 대한 자발적 리콜을 발표했다. 선제적 조치로 보였지만, 미국 법체계 안에서 이 발표는 곧바로 소송의 탄약이 됐다.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에서 자발적 리콜은 역설적으로 제조사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리콜은 제조사 스스로 결함 존재를 인정한 행위로 해석된다. CPSC(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 리콜 데이터에 따르면, 리콜 발표 후 관련 집단소송이 제기되기까지 걸리는 평균 기간은 30일 이내다.

유아용 식품 소송에서 배상 청구액이 다른 제품군보다 높은 이유는 피해자가 영유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법원은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피해자에 대해 제조사의 주의 의무 수준을 최고로 설정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될 경우 실제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이 가능하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미국향 유아·아동용 제품 제조사는 리콜 결정 시점에 소송 대응 프로토콜을 동시 가동해야 한다. ② 리콜은 소비자 안전 절차, 소송 대응은 별개의 법적 프로세스다. 같은 팀이 처리하면 실패한다.


2. 레저·운송 장비: 안전 경고가 면책이 되지 않는다

Malibu Boats는 특정 모델에서 선수 침수로 인해 최소 탑승 인원을 태울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안전 경고를 자사 채널을 통해 공지했다. 이후 제기된 소송에서 이 경고문은 오히려 피고에게 불리한 증거로 활용됐다.

미국 법원은 '경고 결함(Warning Defect)' 이론과 '설계 결함(Design Defect)' 이론을 별도로 판단한다. 경고를 붙였다고 해서 설계 결함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결함을 인지한 상태에서 판매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징벌적 손해배상 요건인 '고의적 무시(Conscious Disregard)'에 해당할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BMW of North America v. Gore, 1996)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실제 손해의 단일 자릿수 배율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했지만, 실제 하급심에서는 여전히 수배의 배상이 인정되는 사례가 반복된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레저 장비, 선박, 이동수단 수출 기업은 내부 품질 보고서와 소비자 불만 접수 기록을 소송 증거 관점에서 관리해야 한다. ② 결함 인지 후 내부 이메일, 회의록에 남긴 표현 하나가 징벌적 손해배상 근거가 된다.


3. 건자재·설비: 소멸시효가 판매 종료 후에도 흐른다

Mueller 미니 스플릿 라인 세트와 Uponor PEX 배관 소송은 건축 설비 자재의 잠복형 결함(Latent Defect)이 어떤 법적 리스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구리 튜브 미세 균열, PEX 배관 누수 모두 설치 후 수년이 지나 발현된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제조물책임 소멸시효의 기산점은 '피해 발생 시점' 또는 '피해 발견 시점(Discovery Rule)' 중 늦은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 즉 제조사가 해당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10년이 지났더라도, 소비자가 그 시점에 결함을 발견했다면 소송이 가능하다.

미국 내 설치된 PEX 배관 물량은 수천만 미터 단위다. 집단소송으로 묶일 경우 원고단 규모와 배상 총액은 단일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한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건자재·배관·전기 부품·냉난방 설비 수출 기업은 판매 종료 이후에도 소송 리스크를 최소 10~15년 단위로 관리해야 한다. ② 미국향 건설 자재 수출 시 장기 제조물책임보험(Occurrence-based Policy) 설계가 필수다.


4. 디지털 플랫폼: 알고리즘 설계가 '제품 결함'으로 간주된다

로블록스 소송은 디지털 서비스에 제조물책임 이론이 적용되는 최전선 사례다. 원고들의 주장은 플랫폼의 연령 인증 부재, 성인-아동 접촉 차단 실패, 허술한 신고 시스템이 '설계 결함'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온라인 플랫폼의 책임을 제한해온 통신품위법 제230조(Section 230)는 최근 아동 보호 영역에서 적용 예외 논의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2024년 이후 복수의 주에서 아동 온라인 보호법이 시행됐고, 연방 차원의 입법 논의도 가속화됐다. 로블록스 소송은 이 법적 환경 변화와 맞물려 진행 중이다.

소셜미디어 중독 소송은 현재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제품책임 집단소송 중 하나로 발전하고 있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틱톡·스냅챗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 건수는 수천 건에 달하며, 주장의 핵심은 무한 스크롤, 변동 보상 알고리즘(Variable Reward Schedule), 수면 시간대 푸시 알림이 의도적으로 설계된 중독 유발 기제라는 것이다. 비디오게임 중독 소송도 동일한 이론적 틀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미국에 앱·게임·소셜 플랫폼을 출시하는 기업은 참여 유도 기능 설계 단계에서 법적 검토를 병행해야 한다. ② 아동·청소년 이용자가 포함된 서비스라면 Section 230 의존 전략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③ 내부 사용자 행동 데이터, A/B 테스트 결과, 중독성 관련 내부 연구가 소송에서 핵심 증거로 제출된다.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의 구조적 특성 5가지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은 한국 기업들이 경험한 어떤 법적 환경과도 다르다. 다음 다섯 가지는 반드시 전제로 깔고 있어야 한다.

① 3가지 결함 이론이 동시에 적용된다 설계 결함(Design Defect), 제조 결함(Manufacturing Defect), 경고 결함(Warning Defect)은 각각 독립적인 소송 근거다. 하나를 방어해도 나머지 두 개가 남는다.

② 집단소송(Class Action)은 배상액을 수직으로 올린다 1인 피해액이 $500이어도, 원고단이 10만 명이면 청구액은 5,000만 달러가 된다. 여기에 변호사 비용, 징벌적 손해배상이 더해진다.

③ 내부 문서는 적이 된다 미국 소송의 증거개시(Discovery) 절차에서 이메일, 품질 보고서, 설계 회의록 전부가 상대방에게 제출된다. 결함을 알면서 출시했다는 흔적이 하나라도 나오면 사건의 성격이 바뀐다.

④ 아동 피해는 배상 수준이 다른 카테고리다 유아용품, 아동 플랫폼, 청소년 대상 서비스에서의 피해는 법원이 최고 수준의 주의 의무를 부과한다. 징벌적 손해배상 인정 가능성도 가장 높다.

⑤ 잠복형 결함은 소송 시효가 늦게 시작된다 건자재·설비처럼 결함이 수년 후 드러나는 제품은 판매 종료 후에도 오랫동안 소송 위험 아래 놓인다. 단기 보험과 단기 품질 보증으로 커버되지 않는다.


미국 시장에서 제품을 파는 것은 그 제품의 전체 수명 주기에 걸쳐 법적 책임을 지는 계약에 서명하는 것과 같다. 이 계약의 조건을 사전에 읽지 않은 기업만이 소송을 갑작스럽게 맞는다.


일본, 해외 플랫폼 '국내 관리자 의무화' 본격 시행

정책 도입 배경

일본 경제산업성(METI)이 해외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대한 규제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이번 조치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테무(Temu), 쉬인(SHEIN) 등 중국계 해외 플랫폼의 급성장이다. 이들 플랫폼을 통해 일본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제품이 대거 유입되면서 화재 및 각종 안전사고가 잇달아 발생했고, 이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존 체계에서는 일본에 주소나 영업소를 두지 않은 해외 사업자에게 직접 규제를 적용하기 어려웠다. 국내 수입업자가 있을 경우 해당 업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지만, 소비자가 해외 플랫폼을 통해 직접 구매하는 이른바 '직구(직접구매)' 형태에서는 법적 공백이 생겼다. 이를 메우기 위해 일본 정부는 2024년 6월 소비자제품안전법 및 관련 4개 법률의 개정을 의결했으며, 2025년 12월 25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시행 후 주요 영향

개정법의 핵심은 일본에 거점이 없는 해외 사업자에게 일본 내 관리자(Domestic Administrator) 지정을 의무화한다는 것이다. 적용 대상은 가전제품(전기용품안전법 적용 대상), 가스 기기, 어린이용 장난감 등 PS 마크 부착 대상을 포함한 약 500개 품목에 달한다.

위반 시 제재 수위도 상당하다. 안전 기준 미달 제품에 대해서는 리콜 및 수입 금지 명령이 내려지고, 위반 사업자와 국내 관리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네임 앤 셰임(Name & Shame)' 방식의 공표 조치가 병행된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역시 법을 위반한 제품에 대해 판매 중단 또는 계정 정지 의무를 지게 된다.

이로 인해 시장 전반에 걸쳐 구조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내 관리자 지정 비용과 행정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규모 해외 사업자들은 일본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 압력에 직면했다. 반면 이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규모 있는 기업이나 전문 대행사들에게는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업체들의 대응 방안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이번 규제가 부담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핵심 대응 방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내 관리자(대리인) 조기 확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본 현지에 신뢰할 수 있는 국내 관리자를 선임하는 일이다. 일본 내 법인, 현지 파트너사, 또는 전문 규정 준수(Compliance) 대행사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대행사를 이용할 경우 비용이 발생하지만, 규정 위반으로 인한 플랫폼 퇴출이나 리콜 조치보다는 훨씬 낮은 리스크다.

제품 안전 인증 사전 취득 PS 마크 등 일본 내 안전 인증을 수출 전 단계에서 미리 취득해야 한다. 인증 취득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상품 기획 단계부터 반영하지 않으면, 시장 출시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유통 구조 재검토 직접 판매(D2C) 방식보다 일본 내 현지 유통 파트너 또는 수입업자를 통한 간접 판매 구조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현지 유통사가 국내 관리자 역할을 겸하도록 계약을 구성하면 규정 준수와 유통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플랫폼별 정책 변화 모니터링 아마존 재팬, 라쿠텐 등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은 이번 법 시행에 맞춰 입점 요건을 강화하고 있다. 플랫폼별 정책 업데이트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요구 서류나 인증 요건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입법 동향

일본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2026년 3월, 일정 규모 이상의 해외 플랫폼 사업자에게 국내 대리인 지정을 의무화하고, 소비자 분쟁 발생 시 판매자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테무, 알리익스프레스 등 중국 플랫폼의 급성장으로 유발된 소비자 피해 급증이 배경이다.

이는 글로벌 차원에서 '플랫폼 책임론'이 강화되는 흐름을 반영한다. 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 미국의 각 주 단위 플랫폼 규제 논의와 궤를 같이하며, 아시아권에서도 해외 플랫폼에 대한 역외 적용 규제가 본격화하는 추세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유사한 규제 체계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 대리인 지정 의무화가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을 경우, 이를 사전에 체계화한 기업이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보어스 헤드 리스테리아 사태: 120년 브랜드가 무너진 방식

보어스 헤드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집단소송 최종 승인 심리는 2025년 8월로 예정돼 있고, 추가 소송이 계속 진행 중이다. 120년 브랜드가 한 공장의 만성적 위생 실패로 뒤집어진 이 사례는, 식품 안전이 얼마나 무겁고 회복하기 어려운 가치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과 경위

2024년 5월 29일, 미국 여러 주에서 리스테리아증(Listeriosis) 환자가 산발적으로 신고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식중독으로 보였지만, 역학조사를 거듭할수록 하나의 식품 브랜드로 화살표가 향했다. 미국 델리 미트(가공육) 시장의 프리미엄 브랜드, 보어스 헤드(Boar's Head)였다.

조사의 단초를 제공한 건 메릴랜드주 보건부였다. 연구진이 볼티모어 한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보어스 헤드의 리버부어스트(간 소시지)를 검사한 결과,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게네스(Listeria monocytogenes) 오염이 확인됐다. 이 균주는 당시 유행 중이던 리스테리아 집단감염의 원인균과 일치했다.

미 농무부(USDA) 식품안전검사청(FSIS)은 2024년 7월 12일 공식 조사에 착수했고, 역학·실험실·추적 조사 모두 버지니아주 자렛(Jarratt)에 위치한 보어스 헤드 공장을 오염원으로 지목했다.


리콜 규모와 피해 현황

2024년 7월 30일, 보어스 헤드는 자렛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700만 파운드(약 3,175톤) 이상을 전량 리콜했다. 최초에는 리버부어스트 약 20만 파운드로 시작했으나, 나흘 만에 71개 제품군으로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최종 집계 기준으로 미국 19개 주에서 총 61명이 감염됐고, 그 중 60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망자는 일리노이, 뉴저지, 뉴욕(2명), 버지니아, 플로리다, 테네시, 뉴멕시코, 사우스캐롤라이나(2명) 등 10명에 달했다.

이 사태는 2011년 캔탈루프 리스테리아 사건 이후 13년 만에 미국 최대 규모의 리스테리아 집단감염으로 기록됐다. 발병이 공식 종료된 것은 2024년 11월이었다.

리콜 대상 제품의 일부는 해외에도 유통됐다. 수출 대상국은 케이맨 제도,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파나마였다. 미국 외 국가에서의 대규모 추가 리콜은 보고되지 않았으나, 해당 국가들은 즉각 해당 제품의 유통을 중단시켰다.


보어스 헤드는 어떤 회사인가

보어스 헤드는 1905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설립된 가공육 전문 기업으로, 현재 본사는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에 있다. 주식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으며, 창업자 후손들이 지분을 폐쇄적으로 보유하는 비상장 가족 기업이다.

창업 이후 120년간 "최고의 품질"을 슬로건으로 내걸어 왔으며, 500여 종에 달하는 제품군을 보유한 미국 최대 프리미엄 델리 미트·치즈 기업으로 성장했다. 슬로건은 "Compromise elsewhere(타협은 다른 곳에서)"였다. 매출 추정액은 연간 30억 달러(약 4조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과 달리, 내부는 극히 폐쇄적이었다. 2022년 법원 진술에서 20년 경력의 CFO 스티브 쿠렐라코스(Steve Kourelakos)는 자사 CEO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결정은 사실상 프랭크 브런크호스트(Frank Brunckhorst)와 소수 경영진에게 집중돼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구조적 위생 실패

이번 사태는 우연한 오염이 아니었다. 수년에 걸친 만성적인 내부 부패의 결과였다.

USDA 조사관들은 2023년 8월부터 2024년 8월 사이 자렛 공장에서 무려 69건의 위반 사항을 기록했다. 조사관들이 목격한 내용은 검은 곰팡이, 밀듀, 바닥에 고인 혈액, 기계 위의 육류 잔재물, 악취 등이었다.

오염 징후는 더 일찍 감지됐다. 사태 발생 2년 전에 이미 조사관들은 자렛 공장이 "중대한 결함"을 보이며 식품 안전에 "임박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었다. 당시 지적된 문제는 녹슨 장비, 바닥에 응결되는 습기, 벽면에 자라는 녹색 곰팡이 등이었다.

USDA 보고서는 공장 내 "전날 생산 잔재물이 포장 장비를 포함한 곳곳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노출된 식품 위에 응결수가 떨어지는 상황과 수분이 고일 수 있는 균열·구멍·파손된 바닥재도 발견됐다.

이 공장은 연방 검사관이 아닌 버지니아주 공중보건 담당관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 역시 문제의 한 축으로 지목됐다. 전문가들은 규제 당국이 이 수준의 위반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공장 가동을 허용한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경영진의 책임과 제재

2024년 7월 31일, FSIS는 자렛 공장의 모든 생산 활동을 즉시 중단시켰다. 보어스 헤드는 같은 해 9월, 자렛 공장의 영구 폐쇄와 리버부어스트 제품 생산의 전면 중단을 공식 발표했다.

법적 대응도 뒤따랐다. 2024년 9월 3일, 사망한 88세 남성의 유족이 보어스 헤드를 상대로 불법 사망(wrongful death)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후 적어도 7건 이상의 소송이 추가로 제기됐다.

집단소송(class action)과 관련해서는, 보어스 헤드가 리콜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310만 달러(약 42억 원) 규모의 집단소송 합의에 응했다.

그러나 경영진 개인에 대한 형사 책임 추궁이나 고위 임원의 공개적인 사임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회사가 오랜 기간 유지해 온 폐쇄적 지배구조가 책임의 투명한 귀속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태 수습 과정에서 보어스 헤드는 2025년 5월 식품 안전 최고책임자(Chief Food Safety Officer)인 나탈리 다이엔슨(Natalie Dyenson)을 처음으로 임명하고, 프랭크 야니스(Frank Yiannas)가 이끄는 식품 안전 자문위원회를 신설했다. 또한 기존의 가장 약한 수준의 리스테리아 규칙 통제 방식에서 더 엄격한 기준으로 상향 전환했다.

자렛 공장은 1년여의 폐쇄 끝에 2026년 초 재가동에 들어갔다.


한국 식품업계에 주는 메시지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외 식품 사고로 읽고 넘길 일이 아니다.

첫째, 브랜드 명성은 위생 앞에서 무력하다. 보어스 헤드는 120년 업력을 자랑하는 프리미엄 브랜드였다. "타협은 다른 곳에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가장 먼저 타협한 곳은 공장 위생이었다. 한국의 식품 기업들도 브랜드 투자 못지않게 현장 위생 관리에 동등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위반 사항의 누적을 방치하면 반드시 터진다. 자렛 공장은 2년 전부터 경고를 받았다. 69건의 위반 기록이 쌓이는 동안 아무도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식품 공장에서도 HACCP 점검이나 내부 감사에서 반복 지적되는 항목들이 '관행'으로 묵인되는 사례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셋째, 폐쇄적 지배구조는 식품 안전 거버넌스의 적이다. 보어스 헤드의 CFO가 자사 CEO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사실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의사결정 구조가 불투명할수록 위기 대응도 느리고, 책임의 귀속도 흐릿해진다. 오너 중심의 폐쇄적 경영 구조가 흔한 한국 중소 식품기업들에게도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경고다.

넷째, 최고식품안전책임자(CFSO)의 독립적 권한이 필요하다. 보어스 헤드는 이번 사태 이후에야 처음으로 CFSO를 임명했다. 식품 안전 담당자가 사고 발생 전부터 이사회 수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면, 현장 경고 신호는 번번이 묻힌다.

다섯째, 리콜 대응은 속도와 범위가 전부다. 보어스 헤드는 최초 리콜 규모를 과소 책정했다가 나흘 만에 35배 이상 확대했다. 이 지연이 추가 피해를 낳았다. 리콜은 '충분히'보다는 '빠르게, 넓게'가 원칙이다.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아피 파마 어린이 기침약 참사: 리스크 거버넌스의 구조적 실패

200명 어린이의 죽음은 한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 제약사에 보내는 구조적 경고이기도 하다. 이 경고를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는 기업은, 다음 참사의 주역이 될 가능성을 스스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I. 사건의 개요

2022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집단 소아 사망 사건은, 단순한 의약품 사고가 아니라 제약 산업의 공급망 거버넌스 전반이 어떻게 붕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참사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최소 195명의 어린이가 에틸렌글리콜(EG) 및 디에틸렌글리콜(DEG)로 오염된 기침·해열 시럽을 복용한 후 급성 신장 손상으로 사망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5세 미만의 영유아였으며, 이 수치는 단일 의약품 오염 사고로는 현대 제약사에서 유례가 드문 규모에 해당한다.

사건의 지리적 파장 또한 인도네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다. 에틸렌글리콜 오염 시럽으로 인한 소아 사망 사건은 1990년대부터 아르헨티나, 방글라데시, 인도,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해왔으며, 이번 인도네시아 사건은 감비아, 우즈베키스탄 사건과 맞물려 WHO의 글로벌 경고 발령을 촉발하였다. 의약품 공급망의 취약성은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제약 생태계가 공유하는 구조적 리스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22년 10월 의약품 시럽 문제가 불거지자 전국의 모든 액상 의약품 판매를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초강경 조치를 내렸다. 법적 귀결로는, CEO 아리에프 프라세티야 하라합(Arief Prasetya Harahap)을 포함한 아피 파마 임원 4명이 징역 2년 및 10억 인도네시아 루피아(약 6만 3천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자카르타 중앙법원은 아피 파마와 원료 공급업체 CV 사무데라(Samudera)의 공동 과실을 인정하고, 피해 가족에 대한 배상을 명령하였다.


II. 아피 파마: 중견 제약사의 민낯

아피 파마를 단순히 군소 불량 제조사로 규정하는 것은 이 사건의 본질을 오독하는 것이다. PT 아피파르마(PT AFIFARMA)는 1985년 인도네시아 동자바 주 케디리(Kediri)에 설립된 제약사로, 의약품·소비자 제품·한방 의약품을 포괄하는 다각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었다. cGMP(우수 의약품 제조 기준) 인증을 획득하였으며, 2014년 기준 98종의 의약품을 생산하였다.

겉으로는 정부 인증을 갖춘 중견 제약사였다. 인도네시아 국가사회보장 시스템(JKN)을 위한 생산 참여와 ASEAN 경제 공동체 시장 진출까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즉, 아피 파마는 규제의 레이더 밖에 있는 음지의 업체가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운영되던 기업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 사건을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게 만든다.


III. 거버넌스 붕괴의 해부학

사건의 인과관계는 인도네시아 법정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전 세계적인 의약품 등급 프로필렌글리콜(PG) 공급 부족이 발생한 2021년, 소규모 비누 원료 공급업체인 CV 사무데라는 산업용 에틸렌글리콜(EG)을 PG로 재포장해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위조의 방식이었다. CV 사무데라는 대형 화학사 다우 케미칼 태국(Dow Chemical Thailand)의 로고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EG 드럼통에 붙였고, 유통업체 CV 아누그라 페르다나 게밀랑(Anugerah Perdana Gemilang)은 실제 검사 없이 이 가짜 원료에 대한 성분 분석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아피 파마는 이 원료를 아무런 검증 없이 제품 생산에 투입하였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원료의 EG 함량이 최대 99%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WHO의 안전 기준치는 0.1%에 불과하다. 이 오염된 원료는 아피 파마의 기침 시럽 70개 배치 생산에 사용되었다.

거버넌스 실패의 핵심은 입고 검사 절차의 완전한 부재였다. 아피 파마는 2021년 EG 검사 결과 없이 제품을 등록하였으며, 법원은 규제 당국인 바단 POM(Badan POM) 역시 제품을 "무사려하게" 승인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기업과 규제기관 양자 모두 기본적인 원료 검증을 생략한 것이다.

규제 체계의 공백도 사태를 키웠다. 인도네시아에서 EG와 DEG의 허용 기준이 의약품 원료에 처음 도입된 것은 2020년의 일이었으며, 완제품에 대한 명시적 검사 의무는 2023년이 되어서야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법원은 규제 공백을 이유로 아피 파마의 책임을 경감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소비자 단체는 규제기관 BPOM을 상대로 엄격한 품질 검사 부재, 불량 시럽에 대한 취약한 감시, 필수 품질 검사 의무를 제약사 자체에 위임한 점 등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제도의 허점이 산업 전체의 자기규율 부재와 맞물렸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이 사건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IV. 교훈

이 사건에서 도출되는 교훈은 도덕적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제약 거버넌스의 설계 원칙으로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공급망 검증은 면책 불가의 자체 의무다. 납품 업체가 제출한 성분 분석서나 인증서를 수동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거버넌스가 아니다. CV 사무데라는 다우 케미칼 태국의 로고를 무단 도용해 위조 라벨을 제작하였고, 유통업체는 실제 검사 없이 허위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공급망의 어느 고리에서든 사기가 개입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자체 입고 검사(incoming material testing)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제약사의 비위임적 의무다.

원가 압박은 안전 기준을 대체할 수 없다. CV 사무데라의 CEO는 법정에서 단순히 "비용 절감을 위해" 재포장을 감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공급 부족과 원가 압박이 교차하는 국면에서, 대체 원료에 대한 검증 절차를 강화하기보다 비용 절감을 우선한 결과가 어디로 귀결되었는지를 이 사건은 명확히 보여준다.

규제 공백은 기업의 자기 기준을 높이라는 신호지, 낮추라는 허가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EG/DEG 기준이 완제품까지 확대 적용된 것은 202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안전한 제품을 만들 책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약사의 품질 기준은 규제 최저선을 상회하도록 자체 설계되어야 한다.

공급망 위기 국면에서 검증 강도는 더 높아야 한다. 2021년의 전 세계적인 의약품 등급 PG 공급 부족이 이 참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체 원료를 긴급 수배해야 하는 위기 상황은, 통상적인 검증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 정밀한 검증을 요하는 경보 신호다. 위기가 리스크를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은 공급망 관리의 기본 공리다.

거버넌스 실패의 대가는 기업 존속 자체를 위협한다. 아피 파마는 CEO를 포함한 임원이 형사 처벌을 받고, 민사 배상 명령을 받았으며, 브랜드 가치는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 제품 안전 거버넌스를 비용 항목으로 인식하는 기업은, 그 비용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를 훗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닫게 된다.


V. 결론

아피 파마 사건은 제약 산업의 특수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산업에서 품질 관리의 실패는 고객 불만이나 재무적 손실로 귀결된다. 그러나 제약 산업에서 원료 검증의 생략은 곧바로 인명 피해로 이어진다. cGMP 인증과 정부 등록 번호는 안전의 증명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최소 요건일 뿐이다. 그 최소 요건이 실제 운영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것, 그것이 제약 거버넌스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