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다양성을 외쳤던 기업이 취임 5일 만에 모든 것을 뒤집었다. 그 결과는 '조용한 철수'가 아닌, 전방위적 붕괴였다.
DEI, 먼저 개념부터 짚고 가자
요즘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DEI'라는 단어. 정확히 무슨 뜻일까?
DEI는 Diversity(다양성), Equity(형평성), Inclusion(포용성) 세 단어의 앞글자를 딴 개념이다.
- 다양성(Diversity): 인종, 성별, 나이, 국적, 종교 등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조직 내에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
- 형평성(Equity): 단순한 '평등(equality)'과 다르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도록 구조적으로 지원하는 것
- 포용성(Inclusion): 다양한 구성원 모두가 환영받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것
기업 차원에서 DEI 정책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다. 채용 다양성 목표 설정, 소수 집단 소유 공급업체 우대, 직원 교육 프로그램 운영, 외부 다양성 지수 보고 등 구체적인 제도와 예산이 동반된다.
타겟(Target)은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흑인 소유 브랜드와 커뮤니티 지원에 20억 달러(약 2조 7천억 원)를 약속하며 DEI 분야에서 미국 기업의 모범 사례로 꼽혔던 회사다.
왜 DEI를 버렸나
조용하지 않았던 '전략적 재조정'
2025년 1월 25일, 타겟은 짤막한 발표를 내놓았다. 3년간 추진해 온 DEI 목표를 종료하고, 흑인 소유 브랜드 지원 이니셔티브(REACH)를 폐기하며, 외부 다양성 지수 보고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공식 설명은 단 한 문장이었다.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사업 전략 재조정."
그런데 이 발표가 나온 날이 언제였는지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5일째 되던 날이었다. 취임식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던 바로 그 회사가, 취임 5일 만에 수십 년간 쌓아온 DEI 정책 전체를 접었다.
이유 1. 트럼프 행정부의 직접적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3일째 되는 날 공개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행정부는 연방 정부와 민간 기업 전반에서 차별적인 DEI 정책을 철폐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서명된 행정명령은 연방 계약 기업들을 직접 겨냥했고, 보수 성향의 주주 그룹들은 DEI가 기업 가치를 훼손한다며 소송을 예고했다.
이유 2. 법적 리스크의 급격한 증가
2023년 미국 대법원은 대학 입시에서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어퍼머티브 액션)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 기업의 DEI 기반 채용 관행과 공급업체 우대 정책도 법적 도전에 취약해졌다. 기업 법무팀들이 일제히 리스크 재검토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유 3. 이미 경험했던 불매운동의 학습 효과
타겟은 2023년에도 프라이드(Pride) 관련 상품 진열로 보수층의 대규모 불매운동을 경험했다. 당시 CEO 브라이언 코넬은 직접 "부진한 실적의 원인 중 하나"로 이를 언급했다. 이 경험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유 4. 경쟁사들의 선례
타겟이 DEI 폐기를 선언하기 전후로, 미국 주요 기업들이 이미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월마트(Walmart)는 DEI 공약을 조용히 수정했고, 메타(Meta)는 다양성 교육 프로그램을 폐지했으며, 아마존은 내부 메모를 통해 관련 관행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골드만삭스, JPMorgan 등 금융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2025년 S&P 500 기업들의 공시 문서에서 DEI 관련 언급이 전년 대비 68% 감소했다.
그래서, 결과는?
타겟의 계산은 이랬을 것이다. 정치적 압박을 피하고, 법적 리스크를 줄이고, 보수층 소비자를 잃지 않겠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전국 단위 불매운동
2025년 2월,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에 맞춰 시민권 단체와 흑인 성직자들이 주도한 전국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특히 타겟에 입점해 있던 흑인 소유 브랜드 판매자들도 피해를 입자, 활동가들은 방향을 틀어 "해당 브랜드를 타겟이 아닌 온라인 직구로 구매하자"는 운동으로 전환했다. 이 불매운동은 2025년 내내 지속됐다.
숫자로 드러난 손실
- 2021년 고점 대비 주가 61% 하락
- 시가총액 약 124억 달러(약 17조 원) 증발
- 불매운동 선언 이후 매장 방문객 연속 8주 감소, 최대 주간 5.7% 하락
- 4분기 매출 3.1% 감소
- 브랜드 호감도 9% 하락
주주 집단소송
주주들은 "타겟이 DEI 정책 변경이 주가와 브랜드 가치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투명하게 공시하지 않았다"며 연방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법률 전문가들은 합의 비용이 수백만 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CEO 사임과 대규모 구조조정
장기 재임 CEO 브라이언 코넬이 논란 속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어 타겟은 10년 만의 최대 구조조정을 발표하며 약 1,800명의 임직원을 감원했다. 물론 아마존·월마트와의 경쟁 심화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불매운동이 만들어낸 매출 감소가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분석가들은 일제히 지목했다.
내부 붕괴
재무 손실만이 아니었다. 회사 내부에서는 직원들의 심리적 안전감과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졌다. 직원 네트워크(ERG) 등 포용 프로그램이 약화됐고, 소수집단 출신 고성과자들의 이직률이 높아졌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심지어 타겟 공동 창업자의 딸들인 앤과 루시 데이턴(Anne & Lucy Dayton)이 공개적으로 "창립 가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진짜 문제
버지니아 공대의 마케팅 교수 슈레얀스 고엔카(Shreyans Goenka)는 CNN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DEI를 지지했다가 철회하는 브랜드는 임의적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DEI를 지지하고, 내일은 철회하면 브랜드 포지셔닝이 일관성을 잃고 비진정성 있게 느껴집니다."
기업 컨설턴트 폰세 드 레온(Ponce de Leon)의 말도 곱씹을 만하다.
"사회의 정치가 바뀌어도, 당신의 가치관은 바뀌어선 안 됩니다."
타겟의 문제는 단순히 DEI 정책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진보적 가치를 브랜드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았던 기업이, 정치적 바람이 바뀌자 5일 만에 그 정체성을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소비자들이 분노한 것은 정책 변경 자체가 아니라, 그 돌변의 속도와 무게였다.
그래서 DEI는 끝난 건가?
타겟을 비롯한 기업들의 후퇴가 DEI의 종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반응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영국의 자산운용사 슈로더스(Schroders)와 로열 런던(Royal London)은 타겟의 DEI 후퇴를 "장기적 재무 리스크"로 공식 규정하고, 이사회에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이들에게 DEI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가 아닌, 포트폴리오 리스크 관리의 문제다.
2025년 하반기, 타겟은 뒤늦게 흑인 창업자 지원 단체 RICE와의 파트너십을 공개하며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떠난 신뢰를 되찾기에 충분한 제스처인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타겟이 증명한 것
타겟의 사례가 남기는 교훈은 역설적으로 단순하다.
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DEI를 버렸더니, 더 큰 정치적·경제적·브랜드 위기가 찾아왔다. 불매운동을 두려워해 한쪽의 눈치를 봤더니, 더 강력한 불매운동이 반대편에서 터졌다. 소송을 피하려 했더니, 주주 집단소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타겟의 실적 부진에는 아마존·월마트와의 경쟁 심화, 소비 침체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분석가들은 DEI 후퇴가 만들어낸 '신뢰의 공백'이 모든 부정적 요소를 증폭시켰다고 입을 모은다.
브랜드는 단기적 수익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브랜드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일관성과 진정성이다.
타겟은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참고: Fortune, CNN Business, Reuters, Bloomberg, Diversity.com, Retail Brew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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