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정직하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자본은 위험을 피해 더 높은 곳으로 도망친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홍수 보험 이탈 현상은 기후 위기가 더 이상 환경 단체의 구호가 아닌, 개인의 지갑을 위협하는 실존적 경제 위기임을 증명하고 있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이 도입한 새로운 보험료 산정 방식인 위험등급 2.0(Risk Rating 2.0)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재난의 비용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지난 4년간 25만 가구가 스스로 안전벨트를 풀고 거친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보조금의 종말과 냉혹한 현실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국가홍수보험프로그램(NFIP)은 일종의 환상 속에서 운영되었다. 실제 위험보다 턱없이 낮은 보험료를 책정하며 고위험 지역의 거주를 사실상 정부가 보조해온 셈이다. 그 결과 미 재무부에는 200억 달러라는 거대한 부채가 쌓였고, 사람들은 홍수 위험이 도사리는 해안가에 집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2021년 도입된 위험등급 2.0은 이 관습적인 평화를 깨뜨렸다. 인공지능과 최신 수문학 데이터를 동원해 개별 주택의 실질적인 홍수 위험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하자, 보험료는 천문학적으로 치솟았다. 가격이 현실화되자 가입자들은 등을 돌렸다. 보험료 인상 폭이 큰 지역에서는 기존 가입자의 최대 13%, 신규 가입 대상자의 39%가 보험 가입을 포기했다. 경제적 합리성이 안전이라는 본능적 욕구를 압도한 순간이다.
재난의 양극화, 가난할수록 더 깊이 잠긴다
문제는 이 이탈이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부유한 계층은 인상된 보험료를 감당하거나 자력으로 수해 방지 시설을 구축할 여력이 있지만, 저소득층에게 치솟는 보험료는 곧 퇴거 명령이나 다름없다. 미국 전체 주택 소유자의 단 4%만이 홍수 보험을 유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보험의 공백은 단순히 개인의 파산에 그치지 않는다. 재난 발생 시 가계 회복이 지연되면 지역 경제가 무너지고, 이는 다시 주택담보대출 연체로 이어져 금융 시스템 전체의 리스크로 전이된다. 기후 변화가 자산 가치를 파괴하고 계층 간 격차를 벌리는 불평등의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사이트: 위험의 가격은 누가 지불해야 하는가
재난 관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위험에 기반한 가격 책정은 옳은 방향이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빠졌다고 말이다. 위험을 정확히 알리는 것과 그 위험을 감당하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인프라 전문가인 한 연구원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시장의 논리로만 접근하면 도시는 유령 마을이 될 것이다. 위험 기반의 가격 책정을 유지하되, 저소득층을 위한 소득 연계 보조금과 지역 단위의 홍수 통제 인프라 투자가 병행되어야 한다.
정치적 격랑 속에 놓인 FEMA의 운명
이러한 혼란 속에서 차기 트럼프 행정부는 FEMA의 구조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조직의 효율성을 명분으로 개편이나 축소, 심지어 폐쇄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재난 안전망이 약화될 경우, 홍수 리스크에 노출된 25만 가구 너머의 수백만 가구는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기후 리스크는 이제 추상적인 미래가 아니라 매달 날아오는 보험료 청구서에 박힌 숫자로 우리 곁에 와 있다. 미국 NFIP의 위기는 탄소 배출을 줄이지 못한 인류가 지불해야 할 연체료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안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이 우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어떻게 수선할 것인가. 이제 국가와 시장이 답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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