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는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10년의 기록과 과제
자본시장의 ‘거대한 오너(Universal Owner)’ 국민연금이 거수기라는 오명을 벗고 진정한 파수꾼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한 지 수년이 흘렀다. 한국ESG기준원(KCGS) ‘ESG리뷰’ 제117호에 수록된 박상인 교수와 이시은 연구생의 연구는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기점으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거둔 양적 성취와 그 이면에 가려진 질적 한계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날카롭게 해부한다.
1. 프롤로그: ‘거수기’에서 ‘스튜어드’로의 전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는 기관투자자의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스튜어드십 코드’에 주목했다. 한국 역시 2016년 도입을 결정했고, 국내 주식시장의 압도적 포식자인 국민연금은 2018년 7월 이를 공식화했다. 이는 단순히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 투자 대상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제고하고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이었다.
2. 양적 데이터가 증명하는 변화의 궤적
연구팀이 분석한 2014년부터 2023년까지의 약 37,000여 건의 의결권 행사 내역은 국민연금의 태도 변화를 숫자로 명확히 보여준다.
반대 의결권의 비약적 상승: 2014년 8.17%에 불과했던 반대율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초기인 2018년 17.17%, 2019년 17.47%까지 치솟았다.
통계적 유의성: 로짓 회귀분석 결과, 코드 도입 이후 국민연금이 주주총회 안건에 반대표를 던질 개연성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이는 제도 도입이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구조에 실질적인 충격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3. 안건 유형별 분석: ‘보수’는 엄격하게, ‘지배구조’는 신중하게
국민연금의 목소리는 모든 곳에서 균등하게 커진 것이 아니었다. 연구는 특정 안건에 집중된 ‘선택적 견제’의 양상을 폭로한다.
이사 보수 한도에 대한 전방위적 견제: 가장 극적인 변화는 보수 관련 안건에서 나타났다. 도입 전후를 비교했을 때 보수 안건에 대한 반대율은 7.6%에서 22.7%로 세 배 가까이 폭증했다. 경영진의 과도한 보수 책정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이 확실한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 지배구조 안건의 정체: 반면, 기업의 생사와 직결되는 이사 선임이나 정관 변경 안건에 대해서는 오히려 도입 이후 반대표를 던질 확률이 유의미하게 낮아지거나 정체되는 역설적인 모습이 관찰되었다. 이는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본질적 과제 앞에서는 국민연금이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4. 날카로운 비판: 대기업집단이라는 ‘성역’
본 연구의 가장 뼈아픈 통찰은 재벌 대기업집단을 향한 국민연금의 시선에 있다.
재벌 기업에 대한 관대한 잣대: 분석 기간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은 대기업집단 소속 기업의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의 반대 확률이 비재벌 기업보다 유의미하게 낮았다는 점이다.
자문기구와의 괴리: 의결권 자문기관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CGCG)가 반대를 권고한 ‘부적절한 안건’을 대상으로 분석했을 때, 대기업집단에 대한 국민연금의 반대 투표는 코드 도입 이후 오히려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총수의 지배력이 강력한 대기업집단을 견제하는 데 있어 독립성과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실증적 증거다.
5. 에필로그: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주주권을 향하여
박상인 교수의 연구는 우리에게 자본시장의 공정성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37,000여 건의 안건 중 실제 주주총회 현장에서 부결되는 안건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주주총회가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머물고 있음을 방증한다.
국민연금이 보수 안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것이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본질적 투쟁을 가리는 ‘착시 효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스튜어드십의 완성은 대기업집단의 사익 편취나 지배구조 왜곡에 대해 얼마나 독립적이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느냐에 달려 있다.
국민연금은 이제 양적 지표의 성장을 넘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심장을 겨냥하는 질적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소중한 노후 자금을 수탁받은 ‘관리자’로서 다해야 할 마지막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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