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스 헤드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집단소송 최종 승인 심리는 2025년 8월로 예정돼 있고, 추가 소송이 계속 진행 중이다. 120년 브랜드가 한 공장의 만성적 위생 실패로 뒤집어진 이 사례는, 식품 안전이 얼마나 무겁고 회복하기 어려운 가치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과 경위
2024년 5월 29일, 미국 여러 주에서 리스테리아증(Listeriosis) 환자가 산발적으로 신고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식중독으로 보였지만, 역학조사를 거듭할수록 하나의 식품 브랜드로 화살표가 향했다. 미국 델리 미트(가공육) 시장의 프리미엄 브랜드, 보어스 헤드(Boar's Head)였다.
조사의 단초를 제공한 건 메릴랜드주 보건부였다. 연구진이 볼티모어 한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보어스 헤드의 리버부어스트(간 소시지)를 검사한 결과,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게네스(Listeria monocytogenes) 오염이 확인됐다. 이 균주는 당시 유행 중이던 리스테리아 집단감염의 원인균과 일치했다.
미 농무부(USDA) 식품안전검사청(FSIS)은 2024년 7월 12일 공식 조사에 착수했고, 역학·실험실·추적 조사 모두 버지니아주 자렛(Jarratt)에 위치한 보어스 헤드 공장을 오염원으로 지목했다.
리콜 규모와 피해 현황
2024년 7월 30일, 보어스 헤드는 자렛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700만 파운드(약 3,175톤) 이상을 전량 리콜했다. 최초에는 리버부어스트 약 20만 파운드로 시작했으나, 나흘 만에 71개 제품군으로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최종 집계 기준으로 미국 19개 주에서 총 61명이 감염됐고, 그 중 60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망자는 일리노이, 뉴저지, 뉴욕(2명), 버지니아, 플로리다, 테네시, 뉴멕시코, 사우스캐롤라이나(2명) 등 10명에 달했다.
이 사태는 2011년 캔탈루프 리스테리아 사건 이후 13년 만에 미국 최대 규모의 리스테리아 집단감염으로 기록됐다. 발병이 공식 종료된 것은 2024년 11월이었다.
리콜 대상 제품의 일부는 해외에도 유통됐다. 수출 대상국은 케이맨 제도,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파나마였다. 미국 외 국가에서의 대규모 추가 리콜은 보고되지 않았으나, 해당 국가들은 즉각 해당 제품의 유통을 중단시켰다.
보어스 헤드는 어떤 회사인가
보어스 헤드는 1905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설립된 가공육 전문 기업으로, 현재 본사는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에 있다. 주식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으며, 창업자 후손들이 지분을 폐쇄적으로 보유하는 비상장 가족 기업이다.
창업 이후 120년간 "최고의 품질"을 슬로건으로 내걸어 왔으며, 500여 종에 달하는 제품군을 보유한 미국 최대 프리미엄 델리 미트·치즈 기업으로 성장했다. 슬로건은 "Compromise elsewhere(타협은 다른 곳에서)"였다. 매출 추정액은 연간 30억 달러(약 4조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과 달리, 내부는 극히 폐쇄적이었다. 2022년 법원 진술에서 20년 경력의 CFO 스티브 쿠렐라코스(Steve Kourelakos)는 자사 CEO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결정은 사실상 프랭크 브런크호스트(Frank Brunckhorst)와 소수 경영진에게 집중돼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구조적 위생 실패
이번 사태는 우연한 오염이 아니었다. 수년에 걸친 만성적인 내부 부패의 결과였다.
USDA 조사관들은 2023년 8월부터 2024년 8월 사이 자렛 공장에서 무려 69건의 위반 사항을 기록했다. 조사관들이 목격한 내용은 검은 곰팡이, 밀듀, 바닥에 고인 혈액, 기계 위의 육류 잔재물, 악취 등이었다.
오염 징후는 더 일찍 감지됐다. 사태 발생 2년 전에 이미 조사관들은 자렛 공장이 "중대한 결함"을 보이며 식품 안전에 "임박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었다. 당시 지적된 문제는 녹슨 장비, 바닥에 응결되는 습기, 벽면에 자라는 녹색 곰팡이 등이었다.
USDA 보고서는 공장 내 "전날 생산 잔재물이 포장 장비를 포함한 곳곳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노출된 식품 위에 응결수가 떨어지는 상황과 수분이 고일 수 있는 균열·구멍·파손된 바닥재도 발견됐다.
이 공장은 연방 검사관이 아닌 버지니아주 공중보건 담당관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 역시 문제의 한 축으로 지목됐다. 전문가들은 규제 당국이 이 수준의 위반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공장 가동을 허용한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경영진의 책임과 제재
2024년 7월 31일, FSIS는 자렛 공장의 모든 생산 활동을 즉시 중단시켰다. 보어스 헤드는 같은 해 9월, 자렛 공장의 영구 폐쇄와 리버부어스트 제품 생산의 전면 중단을 공식 발표했다.
법적 대응도 뒤따랐다. 2024년 9월 3일, 사망한 88세 남성의 유족이 보어스 헤드를 상대로 불법 사망(wrongful death)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후 적어도 7건 이상의 소송이 추가로 제기됐다.
집단소송(class action)과 관련해서는, 보어스 헤드가 리콜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310만 달러(약 42억 원) 규모의 집단소송 합의에 응했다.
그러나 경영진 개인에 대한 형사 책임 추궁이나 고위 임원의 공개적인 사임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회사가 오랜 기간 유지해 온 폐쇄적 지배구조가 책임의 투명한 귀속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태 수습 과정에서 보어스 헤드는 2025년 5월 식품 안전 최고책임자(Chief Food Safety Officer)인 나탈리 다이엔슨(Natalie Dyenson)을 처음으로 임명하고, 프랭크 야니스(Frank Yiannas)가 이끄는 식품 안전 자문위원회를 신설했다. 또한 기존의 가장 약한 수준의 리스테리아 규칙 통제 방식에서 더 엄격한 기준으로 상향 전환했다.
자렛 공장은 1년여의 폐쇄 끝에 2026년 초 재가동에 들어갔다.
한국 식품업계에 주는 메시지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외 식품 사고로 읽고 넘길 일이 아니다.
첫째, 브랜드 명성은 위생 앞에서 무력하다. 보어스 헤드는 120년 업력을 자랑하는 프리미엄 브랜드였다. "타협은 다른 곳에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가장 먼저 타협한 곳은 공장 위생이었다. 한국의 식품 기업들도 브랜드 투자 못지않게 현장 위생 관리에 동등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위반 사항의 누적을 방치하면 반드시 터진다. 자렛 공장은 2년 전부터 경고를 받았다. 69건의 위반 기록이 쌓이는 동안 아무도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식품 공장에서도 HACCP 점검이나 내부 감사에서 반복 지적되는 항목들이 '관행'으로 묵인되는 사례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셋째, 폐쇄적 지배구조는 식품 안전 거버넌스의 적이다. 보어스 헤드의 CFO가 자사 CEO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사실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의사결정 구조가 불투명할수록 위기 대응도 느리고, 책임의 귀속도 흐릿해진다. 오너 중심의 폐쇄적 경영 구조가 흔한 한국 중소 식품기업들에게도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경고다.
넷째, 최고식품안전책임자(CFSO)의 독립적 권한이 필요하다. 보어스 헤드는 이번 사태 이후에야 처음으로 CFSO를 임명했다. 식품 안전 담당자가 사고 발생 전부터 이사회 수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면, 현장 경고 신호는 번번이 묻힌다.
다섯째, 리콜 대응은 속도와 범위가 전부다. 보어스 헤드는 최초 리콜 규모를 과소 책정했다가 나흘 만에 35배 이상 확대했다. 이 지연이 추가 피해를 낳았다. 리콜은 '충분히'보다는 '빠르게, 넓게'가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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