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6일 금요일

2025년 가격담합 대형사건 10선 — 제재 규모와 리스크의 실제

2025년은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의 담합 제재 역사에서 분기점이 된 해다. 2026년 1분기까지 이어진 담합 과징금만 6,891억 원을 돌파했고, 이는 2025년 한 해 전체 담합 과징금(2,189억 원)의 3배를 웃도는 수치다. 업종과 규모를 막론하고 식품, 금융, 통신, 제지, 건설 전 산업에서 담합이 적발됐다. 아래 10개 사건은 2025년에 담합이 진행됐거나 조사·제재가 이뤄진 주요 사건으로, 경영자가 반드시 참고해야 할 실제 사례다.


사건 1. 이동통신 3사 번호이동 판매장려금 담합 — 과징금 963억 원 확정

SK텔레콤·KT·LG유플러스는 2015년 11월부터 2022년 9월까지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가 운영한 이른바 '서초동 시장상황반'을 거점으로 삼아 번호이동 가입자 유치 경쟁을 회피했다. 3사 실무 담당자들이 매일 모여 판매장려금 수준을 공유하고 특정 사업자의 가입자 순증이 쏠리면 다른 회사가 장려금을 낮춰 균형을 맞추는 방식으로 담합을 지속했다. 공정위는 2025년 3월 1,140억 원의 잠정 과징금을 발표했고, 같은 해 7월 963억 원으로 최종 확정했다. 3사는 모두 행정소송을 예고했다. 통신업계 기준 2013년 방통위 제재(1,064억 원) 이후 최대 규모 담합 과징금이다. 경영자 개인에 대한 형사 고발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실무 담당자들의 조직적 공모 정황이 의결서에 명시됐다.

핵심 교훈: '자율 규제 명목의 정례 모임'이 사실상의 담합 채널이 될 수 있다. 업계 협의체를 통한 경쟁 정보 공유는 그 형태를 불문하고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판단될 수 있다.


사건 2. 국고채 전문딜러(PD사) 입찰 담합 — 과징금 최대 수조 원 예상, 심의 진행 중

메리츠증권·키움증권·KB증권·삼성증권·NH투자증권·미래에셋증권·대신증권·교보증권·한국투자증권과 IBK기업은행·NH농협은행·하나은행 등 국고채 전문딜러 15개사가 제재 대상이다. 공정위는 이들이 한국은행 국고채 입찰 전 금리 정보를 사전 공유해 응찰 경쟁을 제한하고 국고채 금리를 인위적으로 높게 형성한 혐의를 포착, 2025년 3월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공정위가 파악한 관련 매출액은 76조 원이며 이론상 최대 과징금은 11조 원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왔다. 8월까지 15개 PD사가 의견서를 제출했고 연내 전원회의가 예고됐다. 한 PD사의 심사보고서상 과징금만 1조 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부의 국채 조달 비용을 높인 행위라는 점에서 도덕적 비난 가능성도 크다. 임직원 고발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핵심 교훈: 금융 시장 내 '정보 공유' 관행은 담합 리스크의 온상이다. 입찰 전 금리·물량 정보를 타사와 교환하는 행위는 명백한 카르텔로 간주된다.


사건 3. 신문용지 제조 3사 가격 담합 — 과징금 305억 원, 1개사 법인 고발

전주페이퍼·대한제지·페이퍼코리아는 2021년 6월부터 2024년 3월까지 국내 33개 신문사에 공급하는 신문용지 가격을 1톤당 12만 원 인상하는 과정에서 사전 합의했다. 이들은 텔레그램, 공중전화 등을 이용해 최소 9차례 가격 조율 모임을 가졌고, 가격 인상 통보 시 단속 회피를 위해 인상 시기와 금액을 서로 다르게 기재하는 등 조직적 은폐를 시도했다. 반발한 신문사에는 공급량을 50% 삭감하겠다고 압박까지 가했다. 공정위는 2024년 11월 제재를 확정해 총 30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가담 정도가 가장 심한 업계 1위 전주페이퍼를 검찰에 고발했다.

핵심 교훈: 담합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은폐 시도는 오히려 공정위가 '조직적 담합'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은폐 행위 자체가 가중 처벌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건 4. 인쇄용지 제조 6사 가격 담합 — 과징금 3,383억 원, 2개사 법인 고발, 가격재결정 명령

무림SP·무림페이퍼·무림P&P·한국제지·한솔제지·홍원제지 등 인쇄용지 제조·판매 6개사는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약 3년 10개월 동안 60차례 이상 모임을 갖고 총 7차례에 걸쳐 가격 인상 폭과 시기를 사전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공중전화와 타 부서 직원 명의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연락처를 이니셜이나 가명으로 관리하는 등 조직적 은폐까지 동반됐다. 동전·주사위로 가격 인상 통보 순서를 정한 사례도 확인됐다. 담합 기간 중 평균 판매가격은 약 71% 상승했다. 공정위는 2026년 4월 과징금 3,383억 원을 확정하고, 담합에 가장 깊이 관여한 한국제지와 홍원제지를 검찰에 고발했다. 아울러 20년 만에 '독자적 가격재결정 명령'을 내려 각 제지사는 향후 3년간 반기마다 가격 변경 내역을 공정위에 보고해야 한다.

핵심 교훈: 교과서·문제집 등 교육 분야 핵심 원재료의 담합은 소비자 전가 효과가 명백해 중대성 평가에서 최고 수준을 받고, 가격재결정 명령이라는 전례 없는 추가 제재까지 받을 수 있다.


사건 5. 4대 시중은행 부동산 담보인정비율(LTV) 정보 교환 담합 — 과징금 2,720억 원, 전원 소송 예고

KB국민은행(697억 원)·신한은행(638억 원)·하나은행(869억 원)·우리은행(515억 원) 등 4대 시중은행이 2022년 3월부터 2024년 3월까지 최소 736건에서 최대 7,500건에 이르는 부동산 담보인정비율(LTV) 정보를 수시로 교환한 행위에 대해 공정위가 2026년 1월 총 2,72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는 2021년 말 개정 공정거래법에 도입된 '정보 교환 담합 금지' 조항이 실제 제재로 이어진 첫 사례라는 점에서 선례적 의미가 크다. 내부 문건에는 "담합 이슈 때문에 파일로 주고받지 못하고 일일이 적었다", "뒤로 윈윈한다"는 표현이 담겨 있었다. 4개 은행은 모두 2026년 3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핵심 교훈: 가격·물량의 직접 합의 없이 '정보 교환'만으로도 담합이 성립한다. 이는 금융권을 넘어 모든 업종에 해당한다. 경쟁사와 교환하는 거래 조건 관련 정보의 법적 위험성을 재검토해야 한다.


사건 6. 설탕 제조 3사 가격 담합 — 과징금 4,083억 원, 식품업 역대 최대

CJ제일제당(1,507억 원)·삼양사(1,303억 원)·대한제당(1,274억 원) 등 설탕 제조 3사는 2021년 2월부터 2025년 4월까지 4년여간 B2B 설탕 판매가격의 인상·인하 폭과 시기를 총 8차례 사전 합의했다. 공정위가 2024년 3월 조사에 착수한 이후에도 1년 이상 담합을 지속한 것이 확인됐다. 2007년 동일 혐의로 511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전력이 있음에도 다시 담합을 반복한 점, 진입장벽이 높은 과점 시장 구조를 적극 활용한 점이 중대성을 높였다. 공정위는 부과기준율 최고 수준인 15%를 적용해 2026년 2월 총 4,083억 원의 과징금을 확정했다. 식품업 담합 단일 사건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핵심 교훈: 과거 담합 제재 전력이 있는 상태에서 재범을 저지르면 과징금 부과기준율이 대폭 가중된다. '반복 담합' 기업이 받는 제재 수위는 급격히 올라간다.


사건 7. 밀가루 제분 7사 가격·물량 담합 — 심사보고서 발송, 최대 1조 원대 과징금 예고

CJ제일제당·대한제분·대선제분·사조동아원·삼양사·삼화제분·한탑 등 제분 7개사는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약 6년에 걸쳐 밀가루 B2B 판매가격 인상 폭·시기를 합의하고 수요처별 물량을 배분했다. 이들의 국내 B2B 밀가루 시장 점유율은 88%에 달한다. 공정위 산정 관련 매출액은 5조 8,000억 원이며 최대 과징금은 이론상 1조 2,000억 원에 이른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미 6개 법인과 임직원 14명을 기소했다. 공정위는 2026년 2월 심사보고서를 발송하며 20년 만에 가격재결정 명령까지 포함할 의사를 밝혔다. 최종 제재는 전원회의를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핵심 교훈: 검찰이 먼저 임직원을 기소한 뒤 공정위 제재가 뒤따르는 복합 제재 구도가 현실화됐다. 형사 처벌과 행정 제재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으며, 임원 개인의 형사 책임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사건 8. 전분당 제조 4사 가격 담합 — 심의 착수, 최대 1조 2,000억 원대 과징금 가능

대상·사조CPK·삼양사·CJ제일제당 등 전분당 제조·판매 4개사는 2018년 5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약 7년 6개월 동안 물엿, 포도당, 액상과당 등 전분당 판매가격을 반복적으로 합의했다. 관련 매출액은 6조 2,000억 원으로 산정됐다. 공정위 심사관은 2026년 3월 심사보고서를 발송하면서 가격재결정 명령, 과징금 부과, 임직원 고발 의견을 모두 포함시켰다. 설탕 담합 조사 과정에서 전분당 담합 정황을 추가로 포착해 수사가 확장된 사례다. 식품 원재료 담합의 연쇄 적발이라는 점에서 업계 전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핵심 교훈: 한 사건 조사 중 연관 담합을 추가로 적발하는 '확장 조사'가 공정위의 표준 방식이 되고 있다. 한 품목의 담합이 발각되면 연관 시장 전체로 조사가 번질 수 있다.


사건 9. 신문용지 이어 인쇄용지 — 제지업 연쇄 담합 적발의 구조적 문제

신문용지 3사(2024년 11월 제재 확정)에 이어 인쇄용지 6사(2026년 4월 제재 확정)까지 제지업 전반에서 담합이 연속 적발됐다. 두 사건 모두 코로나19 이후 원가 상승을 가격 전가의 구실로 삼아 공급사 간 가격 인상을 사전 합의한 구조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인쇄용지 6사 사건에서는 교과서·학습지 등 교육 분야 원재료 가격이 평균 71% 상승하며 피해가 최종 소비자에게 직접 전가됐다는 점이 제재 수위를 끌어올렸다. 두 사건을 합산하면 제지 업계에서만 과징금 총 3,688억 원이 부과됐다.

핵심 교훈: 업계 전반의 관행처럼 굳어진 담합일수록 일단 한 곳이 적발되면 연쇄 제재가 뒤따른다. '우리만 하는 게 아니다'는 논리는 공정거래법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


사건 10. 식품 원재료 시장 전방위 조사 — 달걀·돼지고기·전분당 부산물로 확대

공정위는 설탕·밀가루·전분당 담합을 연속 적발하면서 달걀, 돼지고기, 전분당 부산물(사료용 글루텐피·배아 등) 시장에 대한 병행 조사도 진행 중임을 공식화했다. 공정위는 "민생물가와 직접 연결된 식료품 분야 담합을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방침 아래 식품 원재료 카르텔 근절을 2025~2026년 최우선 집행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식품 공급망 전체를 겨냥한 구조적 조사로, 관련 업계 경영자라면 자사 거래 관행 전반에 대한 즉각적인 내부 점검이 필요한 상황이다.

핵심 교훈: 공정위가 특정 업종을 집중 조사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업종 전체가 리스크 영역에 들어간다. 조사 대상이 되기 전에 내부 자진 시정으로 선제 대응하는 것이 과징금 감경의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다.


담합 제재의 흐름이 바뀌었다 — 경영자가 기억해야 할 3가지 변화

첫째, 과징금 부과기준율이 구조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설탕 담합에 적용된 기준율 15%는 과거 평균(3.5%)의 4배를 넘는다. 2026년 시행 예정인 개정 과징금 고시는 담합 기준율 하한을 0.5%에서 10%로 대폭 올리고 반복 위반 시 최대 100%를 가중한다. 같은 행위를 해도 앞으로 받는 과징금은 지금보다 몇 배 더 클 수 있다.

둘째, '정보 교환'만으로도 담합이 성립한다. 4대 은행 LTV 사건은 가격 직접 합의 없이 거래 조건 정보 교환만으로도 공정거래법 위반이 된다는 사실을 한국 최초로 확정한 사례다. 경쟁사와의 모든 정보 교환 채널을 점검해야 한다.

셋째, 임직원 개인 고발이 현실화됐다. 밀가루 담합 사건에서 임직원 14명이 기소됐고, 인쇄용지 사건에서도 법인 2개사가 고발됐다. 담합은 더 이상 회사의 법무팀이 사후에 수습하는 문제가 아니다. CEO를 포함한 경영자 개인의 형사 리스크다.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중국 법원, 보증기간 지나도 책임 — 하베스터 화재 사건의 경고

보증서의 만료일은 제조사의 책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결함이 숨어있던 시간이 드러나는 날일 수 있다.


중국 법원, 보증기간 지나도 제조사 책임 면제 안 된다 — 하베스터 화재 사건의 경고

사건 개요

2024년 9월 29일, 중국 최고인민법원(SPC)은 제품 품질 관련 주요 전형 사례 묶음을 공개했다. 그 중 하나가 보증기간 경과 후 제품 결함에 대한 제조물 책임을 다룬 사건이다. 사건 번호는 (2023) 冀05民终4841号, 판결 법원은 허베이성 싱타이 중급인민법원(邢台市中级人民法院)이다.

원고는 피고로부터 하베스터(수확기)를 구매했으며, 해당 제품에는 12개월 보증이 적용되었다. 사용 16개월 후 기기의 배선 불량으로 화재 사고가 발생해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원고는 제품 결함을 이유로 피고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법원은 배선 결함이 신체 및 재산 안전에 대한 불합리한 위험을 구성한다고 판단하고, 보증기간이 경과했다 하더라도 사업자는 제품 결함에 대한 제조물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용했다.


핵심 법리 — 보증기간은 '무상 수리 기간'일 뿐

중국 법원이 이 사건에서 확립한 원칙은 단순하고 강력하다. 보증기간(Warranty Period)은 제조사가 무상으로 수리·교환을 제공하는 기간에 불과하며, 그 기간의 만료가 제조물 책임(Product Liability)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제품질량법(Product Quality Law)에 따르면, 제품에 인체 건강이나 재산 안전을 위협하는 '불합리한 위험'이 존재하는 경우 해당 제품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불합리한 위험'의 존재 여부는 통상 법원이 개별 사안별로 판단하며, 일반적으로 소비자 기대 기준(consumer expectation test)을 적용한다.

원고는 제품 결함, 손해, 그리고 양자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기본 증명책임을 부담한다. 다만 복잡한 기술 공정이 수반된 제품의 경우, 법원은 원고 측의 증명 기준을 낮출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관건은 화재 원인이 '내재적 결함(Hidden Defect)'으로 판정되었다는 점이다. 생산 당시부터 존재했던 배선 설계·제작상의 결함이 16개월 후 발현된 것이므로, 보증기간 경과라는 방어 논리는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의 제품 관련 규제 및 법원 판결 경향

중국 제품질량법은 제조사와 판매자 모두에게 소멸시효를 적용한다. 원칙적으로 청구는 결함이 발견되었거나 발견될 수 있었던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제기되어야 하며, 제품이 최초 소비자에게 인도된 날로부터 10년을 초과할 수 없다.

중국 법원이 자동차 제품 책임 분쟁에서 처리하는 사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차량 화재 사건이다. 화재 피해가 다른 재산까지 미치지 않고 해당 제품에만 국한된 경우에도, 제조사가 명시적으로 제품질량법 제43조를 방어 논거로 제시하더라도 중국 법원이 이를 인용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품질 문제가 차량 안전과 관련된 경우, 안전 사고가 실제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인민법원은 해당 분쟁을 제조물 책임 분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사업자와 소비자 간에 합의된 반품·교환·수리 보증기간은 법정 기준보다 짧을 수 없다. 사업자가 교체 의무를 이행한 경우 보증기간은 교체 완료일로부터 다시 기산된다.


대중국 수출업체에 대한 경고

이번 최고인민법원의 전형 사례 공개는 단순한 판결 소개가 아니다. 중국 전역의 하급법원에 판결 기준을 제시하는 사실상의 지침이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 제조사가 중국 시장에 기계류, 전자제품, 농기계 등 내구재를 수출할 때 반드시 인지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보증기간을 방패로 삼을 수 없다. 12개월 보증이 만료되었다는 사실은 중국 법원에서 제조물 책임 면탈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제품 자체에 내재한 결함이 사후에 발현된 것임이 입증되면, 그 시점이 언제든 제조사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품질 관리 문서화가 최선의 방어다. 제조 당시의 품질 검사 기록, 부품 사양서, 안전 인증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해야 한다. 법원에서 '결함이 생산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데 이 자료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중국 법원과 중재기관은 통상 직접 손해(환불, 수리 또는 교체)로 배상 범위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유럽 법원 수준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대규모 배상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이는 역으로 피해자가 소송을 쉽게 제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입 장벽이 낮고, 기술 감정 절차가 법원 주도로 진행되므로 제조사 입장에서 부담이 크다.

제품 책임 보험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중국에서 제조사의 손해배상 책임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로부터 회사를 보호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적절한 보험을 확보하는 것이다. 보험료는 중국과의 거래 비용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보증기간이 지났다고 안심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중국 시장은 지금 그 경고를 판결로 명문화하고 있다.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아피 파마 어린이 기침약 참사: 리스크 거버넌스의 구조적 실패

200명 어린이의 죽음은 한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 제약사에 보내는 구조적 경고이기도 하다. 이 경고를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는 기업은, 다음 참사의 주역이 될 가능성을 스스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I. 사건의 개요

2022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집단 소아 사망 사건은, 단순한 의약품 사고가 아니라 제약 산업의 공급망 거버넌스 전반이 어떻게 붕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참사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최소 195명의 어린이가 에틸렌글리콜(EG) 및 디에틸렌글리콜(DEG)로 오염된 기침·해열 시럽을 복용한 후 급성 신장 손상으로 사망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5세 미만의 영유아였으며, 이 수치는 단일 의약품 오염 사고로는 현대 제약사에서 유례가 드문 규모에 해당한다.

사건의 지리적 파장 또한 인도네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다. 에틸렌글리콜 오염 시럽으로 인한 소아 사망 사건은 1990년대부터 아르헨티나, 방글라데시, 인도,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해왔으며, 이번 인도네시아 사건은 감비아, 우즈베키스탄 사건과 맞물려 WHO의 글로벌 경고 발령을 촉발하였다. 의약품 공급망의 취약성은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제약 생태계가 공유하는 구조적 리스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22년 10월 의약품 시럽 문제가 불거지자 전국의 모든 액상 의약품 판매를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초강경 조치를 내렸다. 법적 귀결로는, CEO 아리에프 프라세티야 하라합(Arief Prasetya Harahap)을 포함한 아피 파마 임원 4명이 징역 2년 및 10억 인도네시아 루피아(약 6만 3천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자카르타 중앙법원은 아피 파마와 원료 공급업체 CV 사무데라(Samudera)의 공동 과실을 인정하고, 피해 가족에 대한 배상을 명령하였다.


II. 아피 파마: 중견 제약사의 민낯

아피 파마를 단순히 군소 불량 제조사로 규정하는 것은 이 사건의 본질을 오독하는 것이다. PT 아피파르마(PT AFIFARMA)는 1985년 인도네시아 동자바 주 케디리(Kediri)에 설립된 제약사로, 의약품·소비자 제품·한방 의약품을 포괄하는 다각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었다. cGMP(우수 의약품 제조 기준) 인증을 획득하였으며, 2014년 기준 98종의 의약품을 생산하였다.

겉으로는 정부 인증을 갖춘 중견 제약사였다. 인도네시아 국가사회보장 시스템(JKN)을 위한 생산 참여와 ASEAN 경제 공동체 시장 진출까지 목표로 삼고 있었다. 즉, 아피 파마는 규제의 레이더 밖에 있는 음지의 업체가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운영되던 기업이었다. 바로 이 점이 이 사건을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게 만든다.


III. 거버넌스 붕괴의 해부학

사건의 인과관계는 인도네시아 법정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전 세계적인 의약품 등급 프로필렌글리콜(PG) 공급 부족이 발생한 2021년, 소규모 비누 원료 공급업체인 CV 사무데라는 산업용 에틸렌글리콜(EG)을 PG로 재포장해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위조의 방식이었다. CV 사무데라는 대형 화학사 다우 케미칼 태국(Dow Chemical Thailand)의 로고를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EG 드럼통에 붙였고, 유통업체 CV 아누그라 페르다나 게밀랑(Anugerah Perdana Gemilang)은 실제 검사 없이 이 가짜 원료에 대한 성분 분석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아피 파마는 이 원료를 아무런 검증 없이 제품 생산에 투입하였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원료의 EG 함량이 최대 99%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WHO의 안전 기준치는 0.1%에 불과하다. 이 오염된 원료는 아피 파마의 기침 시럽 70개 배치 생산에 사용되었다.

거버넌스 실패의 핵심은 입고 검사 절차의 완전한 부재였다. 아피 파마는 2021년 EG 검사 결과 없이 제품을 등록하였으며, 법원은 규제 당국인 바단 POM(Badan POM) 역시 제품을 "무사려하게" 승인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기업과 규제기관 양자 모두 기본적인 원료 검증을 생략한 것이다.

규제 체계의 공백도 사태를 키웠다. 인도네시아에서 EG와 DEG의 허용 기준이 의약품 원료에 처음 도입된 것은 2020년의 일이었으며, 완제품에 대한 명시적 검사 의무는 2023년이 되어서야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법원은 규제 공백을 이유로 아피 파마의 책임을 경감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소비자 단체는 규제기관 BPOM을 상대로 엄격한 품질 검사 부재, 불량 시럽에 대한 취약한 감시, 필수 품질 검사 의무를 제약사 자체에 위임한 점 등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제도의 허점이 산업 전체의 자기규율 부재와 맞물렸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이 사건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IV. 교훈

이 사건에서 도출되는 교훈은 도덕적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제약 거버넌스의 설계 원칙으로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공급망 검증은 면책 불가의 자체 의무다. 납품 업체가 제출한 성분 분석서나 인증서를 수동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거버넌스가 아니다. CV 사무데라는 다우 케미칼 태국의 로고를 무단 도용해 위조 라벨을 제작하였고, 유통업체는 실제 검사 없이 허위 증명서를 발급하였다. 공급망의 어느 고리에서든 사기가 개입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자체 입고 검사(incoming material testing)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제약사의 비위임적 의무다.

원가 압박은 안전 기준을 대체할 수 없다. CV 사무데라의 CEO는 법정에서 단순히 "비용 절감을 위해" 재포장을 감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공급 부족과 원가 압박이 교차하는 국면에서, 대체 원료에 대한 검증 절차를 강화하기보다 비용 절감을 우선한 결과가 어디로 귀결되었는지를 이 사건은 명확히 보여준다.

규제 공백은 기업의 자기 기준을 높이라는 신호지, 낮추라는 허가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EG/DEG 기준이 완제품까지 확대 적용된 것은 2023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안전한 제품을 만들 책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약사의 품질 기준은 규제 최저선을 상회하도록 자체 설계되어야 한다.

공급망 위기 국면에서 검증 강도는 더 높아야 한다. 2021년의 전 세계적인 의약품 등급 PG 공급 부족이 이 참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체 원료를 긴급 수배해야 하는 위기 상황은, 통상적인 검증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더 정밀한 검증을 요하는 경보 신호다. 위기가 리스크를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은 공급망 관리의 기본 공리다.

거버넌스 실패의 대가는 기업 존속 자체를 위협한다. 아피 파마는 CEO를 포함한 임원이 형사 처벌을 받고, 민사 배상 명령을 받았으며, 브랜드 가치는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 제품 안전 거버넌스를 비용 항목으로 인식하는 기업은, 그 비용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를 훗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닫게 된다.


V. 결론

아피 파마 사건은 제약 산업의 특수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산업에서 품질 관리의 실패는 고객 불만이나 재무적 손실로 귀결된다. 그러나 제약 산업에서 원료 검증의 생략은 곧바로 인명 피해로 이어진다. cGMP 인증과 정부 등록 번호는 안전의 증명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최소 요건일 뿐이다. 그 최소 요건이 실제 운영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것, 그것이 제약 거버넌스의 본질이다.


2026년 1월 10일 토요일

미테니(Miteni) PFAS 판결의 모든 것 - 141년의 형량과 막대한 손해배상 피소

반세기 동안 북이탈리아 35만 명의 식수를 오염시킨 화학기업 미테니. 2025년 6월,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 경영진이 PFAS 오염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 판결 한눈에 보기

- 총 징역형 합계: 141년
- 유죄 판결 경영진: 11명
- 민사 손해배상금: €7,500만 이상
- 피해 주민 추정치: 약 35만 명

사건의 배경: '영원한 화학물질'이 흘러든 땅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트리시노(Trissino). 아름다운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에 1965년부터 화학공장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RiMar(리마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공장은 이후 여러 번의 소유주 교체를 거쳐 미테니(Miteni S.p.A.)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주요 사업은 불소화 화학 중간체, 즉 PFAS(과불화화합물)의 생산이었다.

PFAS란 탄소와 불소의 강력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합성 화학물질군으로, 열·기름·물에 강한 저항성을 지닌다. 프라이팬 코팅, 방수 의류, 식품 포장재, 소방 폼에 이르기까지 산업 곳곳에 쓰였다. 문제는 이 물질이 자연에서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한 화학물질(forever chemicals)'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인체에 축적되면 암(특히 신장암·고환암), 간 손상, 면역계 억제, 생식 장애 등과 연관된다는 연구결과가 쌓여왔다.

어떻게 오염이 시작됐나

미테니 공장은 수십 년간 PFAS가 포함된 폐수를 적절한 처리 없이 주변 토양과 수계로 방류했다. 오염된 지하수는 비첸차·파도바·베로나 세 개 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검사단에 따르면 경영진은 오염 위험성과 PFAS의 유해성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적절한 환경 보호 조치 없이 가동을 계속했다.

[ 주요 사건 연표 ]

  • 1965년 - RiMar 공장 설립. 이후 여러 소유주를 거쳐 미테니로 운영됨. 미쓰비시가 1998~2009년 지배.
  • 2013년 - 베네토 지역 환경청(ARPAV)이 공장 인근 수계에서 고농도 PFAS를 처음 공식 검출. 사법당국에 통보. 이후 주민 혈액 검사 시작.
  • 2018년 - 규제 압박과 형사수사 속에 미테니 파산 선언 후 공장 폐쇄. 환경 정화 책임은 공공기관으로 이전.
  • 2020년 - 30개 지자체·14만 명이 포함된 '레드존(Red Area)' 선포. 주민 연구에서 당뇨·뇌혈관 질환·일부 암 위험 증가 확인.
  • 2021년 - 형사 재판 시작. 미테니·미쓰비시·ICIG 전직 경영진 15명 기소. 4년간 140회 이상 심리 진행.
  • 2025년 5월 - 비첸차 노동법원, 2014년 미테니 직원 사망과 PFAS 노출의 인과관계를 이탈리아 최초로 법적 인정.
  • 2025년 6월 26일 - 비첸차 중죄법원, 전직 경영진 11명 유죄 선고. 총 징역 141년 + 민사 배상 €7,500만 이상.
판결의 내용: 검사 구형보다 무거운 선고

2025년 6월 26일, 비첸차 중죄법원은 6시간의 평의 끝에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 15명 중 11명에게 유죄가 선고됐고 4명은 무죄 방면됐다. 유죄 판결을 받은 11명의 징역형 합계는 141년으로, 검사가 요청한 121년 6개월을 훌쩍 넘겼다. 최고형은 17년 6개월, 최하형은 2년 8개월이었다.

피고인에는 미테니뿐 아니라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 코퍼레이션과 룩셈부르크 투자펀드 ICIG(International Chemical Investors Group)의 전직 경영진이 포함됐다. 법원은 기업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었더라도 개인의 책임은 면제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미쓰비시 일본인 임원 2명은 각각 16년, 1명은 11년을 선고받았다.

유죄 혐의는 의도적 수질 오염, 의도적 환경 재해, 불법 폐기물 관리 등이었다. 다만 부적절한 폐기물 처리 관련 일부 혐의는 공소시효 만료로 기각됐다.

민사 배상액은 총 €7,500만 이상으로, 이 중 환경부가 €5,600만, 베네토 주정부가 €650만을 수령한다. 민사 원고로 참여한 약 300명의 개인과 단체에도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시민 각자에게는 €5만씩 지급이 결정됐다. 법원은 유죄 선고를 받은 경영진이 향후 정화 및 환경 복구 비용도 공동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것은 역사적 판결입니다. 모범적입니다. 대기업, 특히 다국적 기업도 범죄 행위의 책임을 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반(反)PFAS 활동가 알베르토 페루포, 판결 직후 성명

피고 측은 PFAS를 규제하는 이탈리아 법률이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문제 행위 당시에는 PFAS를 탐지할 기술도 부족했다고 항변했다.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해의 규모: 4,000명의 초과 사망

2024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오염 지역에서 악성 종양(신장암·고환암 포함), 심혈관 질환 등으로 인한 초과 사망이 4,000건에 달한다. '레드 에어리어' 주민 연구에서는 전반적 사망률, 당뇨, 뇌혈관 질환, 일부 암의 위험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탈리아 국립보건원이 설정한 임계값을 크게 초과하는 수준의 PFOA가 주민 혈액에서 검출됐다. ARPAV는 2013년 이후 5만 건 이상의 환경 샘플을 수집·분석했다.

이 싸움을 이끈 것은 시민들이었다. 'Mamme no PFAS(PFAS 반대 엄마들)'라는 풀뿌리 단체를 비롯해 그린피스, 민주의학(Medicina Democratica), 의사환경연대(ISDE)가 민사소송과 사회운동을 병행했다. 200명 이상의 시민이 소송에 직접 참여했다.

이 사건이 남긴 인사이트
  1. 세계 최초의 PFAS 형사 책임 판결 : 이번 판결은 역사상 처음으로 법원이 PFAS 오염에 대해 기업 경영진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은 사례다. 기업의 '법인 책임'에 숨어 있던 개인 경영진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를 전 세계에 보냈다.
  2. 규제 공백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피고 측은 당시 PFAS 규제법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거부했다. '법이 없었으니 책임도 없다'는 논리가 환경 범죄에선 통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소유주가 바뀌어도 책임은 이어진다: 미쓰비시·ICIG 등 전 소유주 임원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기업 매각·합병이 환경 피해에 대한 개인 책임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4. 오염 설비의 '탈출'이라는 새로운 문제: 미테니 공장 폐쇄 후 특허와 산업 장비 일부가 인도로 반출됐다는 조사 보도가 나왔다. 규제가 느슨한 국가로 오염 산업 기반이 이전되는 '환경 도주' 문제를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5. 스웨덴·이탈리아에서 확산되는 PFAS 법적 인식: 2023년 스웨덴 대법원은 주민 혈중 PFAS가 신체 손해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탈리아 판결과 맞물려 PFAS 피해의 법적 지위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격상되고 있다.
남겨진 질문들

이 판결은 1심에 불과하다. 항소심에서 형량이 유지될지, 더 나아가 피해 규모에 걸맞은 완전한 정화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또한 미테니의 설비가 인도에서 재가동될 가능성, 그리고 규제가 약한 나라에서 같은 역사가 반복될지에 대한 우려도 여전하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아직 토양·지하수 내 PFAS에 대한 규제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이탈리아의 반세기짜리 교훈이 다른 나라에서는 예방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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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ntro di Ateneo per i Diritti Umani, Università di Padova (2025.06.27)
- Taft Law PFAS Insights (2025.07.03)
- Renewable Matter — Miteni PFAS Trial (2025.07.04)
- Chemistry World (2025.06)
- Environmental Health News (2025.07.02)
- The Japan Times (2025.06.27)
- Global Agriculture / Miteni PFAS Scandal Explained (2026.01.07)

2026년 1월 4일 일요일

EHS Today 선정 '2025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들'

무엇이 다른가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규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매년 수천 건의 아차사고 신고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직원들, 현장에 BBQ 트레일러를 끌고 나타나는 안전팀,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안전 교육 정식 과정에 편입시킨 건설사. 이것이 2025년 EHS Today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들'의 실제 모습이다.

EHS Today의 'America's Safest Companies Award'는 2002년부터 시작된 미국 최고 권위의 산업 안전 시상식이다. 단순히 사고가 적은 회사를 뽑는 게 아니다. 경영진이 안전을 얼마나 진심으로 챙기는지, 직원들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안전 문화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그 효과를 데이터로 입증할 수 있는지까지 따진다. 쉽게 말해, 서류가 아닌 현장을 보는 상이다.

2025년 수상 기업은 단 6곳. 3만 8천 명을 고용한 글로벌 방위산업체 KBR부터, EHS 전문가가 2명뿐인 중소기업 망간까지 규모도 업종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안전은 팀 하나가 관리하는 업무가 아니라, 조직 전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 이 글은 수상 기업들의 안전 전략과 리더십을 산업별로 해부하고, 한국 기업들이 지금 당장 참고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정리했다.


이 어워즈가 왜 중요한가

EHS Today의 'America's Safest Companies Award'는 2002년에 창설된 이후 23년간, 직장 안전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달성한 기업들을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안전 업계 전반에 공유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왔다.

이 상이 단순한 홍보용 트로피가 아닌 이유가 있다. 수상을 위해서는 경영진의 EHS 지원, 직원의 안전 프로세스 참여, 혁신적 안전 솔루션, 업계 평균 이하의 재해율, 포괄적 교육 프로그램, 예방 중심의 안전 문화, 효과적인 안전 소통 방식, 그리고 안전 프로세스의 효과를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데이터가 모두 갖춰져야 한다.

지금까지 약 300개 기업이 이 상을 받았으며, 일부 기업은 수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2025년 수상식은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에서 열린 Safety Leadership Conference 2025에서 진행되었으며, 아폴로 기계의 Mike Ellis, 망간의 Mary Gurasich, KBR의 Keith Kluger가 수상자 패널로 참여했다.


산업별 수상 기업 분석

과학기술 분야

KBR (케이브르) 과학·기술·엔지니어링 솔루션 / 휴스턴, 텍사스 직원 38,000명 | 사업장 169곳 | EHS 전문가 146명

KBR은 포천 500대 방위산업 기업으로, 안전 철학의 핵심은 'Zero Harm'이다. 부사장 Nick Anagnostou는 이 원칙이 직접 고용 인력뿐 아니라 하청업체 운영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적용된다고 밝혔다.

KBR의 안전 거버넌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절대 원칙(Zero Harm Absolutes)'의 체계다. 작업 중단 권한을 모든 직원·협력사·고객에게 부여하는 'MyKey', 불안전한 행동을 일상적으로 모니터링하는 'Courage to Care Conversations', 모든 사고와 아차사고를 반드시 조사하는 원칙, 그리고 현장 및 사무실의 일상적 위험 요소에 대한 글로벌 지침인 'KBR's Keys'가 이 체계를 구성한다.

특히 'Safety Energy Program'은 모든 프로젝트 현장의 안전 추진력을 측정하는 글로벌 선행지표 프로그램으로, 높은 Safety Energy 수치가 사고 감소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사람·지구·거버넌스 세 축에 집중하며, 10개의 Zero Harm 핵심지표를 통해 UN의 2030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와 연계된 장기 목표를 추적하고 있다.


망간 주식회사 (Mangan Inc.) 석유·가스·파이프라인·제조·바이오제약 / 롱비치, 캘리포니아 직원 375명 | 사업장 9곳 | EHS 전문가 2명

망간의 사례는 규모가 작아도 안전 문화가 탁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EHS 전문가가 단 2명뿐이지만, 시니어 안전 프로그램 매니저 Mary Gurasich가 이끄는 'SMART Card' 프로그램은 직원들이 스스로 작업 환경을 관찰·기록하고 개선 의견을 제안하도록 장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프로그램 이름 자체도 직원들이 직접 지었다.

지난해에만 6,000건 이상의 제출이 이뤄졌으며, 이 중 600여 건이 실제 안전 관행의 개선으로 이어졌다. 위험한 현장에 안전 팀이 상주할 수 없는 구조임에도, 직원들은 언제든 작업 중단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는 직원 참여도와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낸 핵심 동력이 됐다.

전체 인력의 약 25%가 본연의 업무 외에 자발적으로 안전 활동을 지원하며, 비상 대피 조율, 응급처치, CPR 훈련, 전기 안전 컴플라이언스 등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제조 분야

알바니 엔지니어드 컴포지츠 (Albany Engineered Composites) 항공우주 제조 / 로체스터, 뉴햄프셔 직원 1,400명 | 사업장 6곳 | EHS 전문가 7명

EHS 시니어 디렉터 Bryan Valdez는 "모든 사고는 예방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신념"이라며, 최우선 과제로 중대재해(SIF) 유발 가능성이 있는 행동·상태·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을 꼽았다.

이 목표를 위해 'SIF 관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각 사업장의 리더십이 제조 현장에 직접 나가 작업 과정을 관찰하고 안전한 행동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핵심은 '경영진의 현장 개입'이다. 수동적으로 보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리더가 직접 현장에 서 있는 구조다.


BL 하버트 인터내셔널 (B.L. Harbert International) 건설 / 버밍햄, 앨라배마 직원 885명 | 사업장 38곳 | EHS 전문가 30명

부사장 Frank Wampol은 "모든 직원이 매일, 안전을 자신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길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안전 계획, 환경 민감성, 교육, 인력 역량 강화, 그리고 조직 전체의 일관된 책임 체계가 안전 문화와 전반적 성공의 필수 요건이라고 강조했다.

BL 하버트는 2014년에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어, 단기적 성과가 아닌 지속적인 안전 경영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건설 분야

아폴로 기계 (Apollo Mechanical) 건설 / 워싱턴주 케네윅 직원 3,400명 | 사업장 10곳 | EHS 전문가 48명

2025년 수상 기업 중 가장 독보적인 접근법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폴로는 안전의 범위를 신체적 위험을 넘어 정신 건강 영역으로 확장했다.

건강·안전 매니저 Mike Smail은 "건설업에서 자살률이 모든 산업재해 사망률의 5배에 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실제로 매년 한 명씩 가족을 잃고 있었지만 업무 외 사망이라는 이유로 공식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물질 남용, 목적의식, 재정적 건강, 신체적 웰빙, 영양, 스트레스, 사회적 연결 등 회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살 위험 요인들을 구체화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들을 하나씩 도입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SPACE(Suicide Prevention and Community Engagement)'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때, 자살 가능성은 낮아지고 도움을 구할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인식이 프로그램의 기반이 됐다. EHS 팀은 현장에 BBQ 트레일러를 끌고 나가 축하 점심을 제공하거나, 직원 사기가 저하됐을 때 현장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유대감을 쌓는다.


세반 멀티사이트 솔루션 (Sevan Multi-Site Solutions, Inc.) 상업용 건물 건설 / 다우너스 그로브, 일리노이 직원 371명 | 사업장 2곳 | EHS 전문가 5명

안전 담당 부사장 Chris Carter는 "세반에서 안전은 요건이 아니라 책임이자 차별화 요소이며, 매일 살아 숨 쉬는 헌신"이라고 말했다. 세반은 OSHA 컴플라이언스를 뛰어넘는 자체적으로 높은 안전 기준을 설정해 예방 우선, 실시간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안전 문화의 보상 구조도 눈길을 끈다. 'Sevan Salute'는 안전 교육을 이수하거나, 아차사고를 신고하거나, 회사 가치를 실천한 직원에게 배지와 상품을 수여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에는 아차사고 1건 신고당 7달러를 지급하고 그 금액을 건설업 자살 예방 단체에 기부하는 'Near Miss Challenge'를 시작했는데, 역대 최다 아차사고 신고 건수를 기록했다.

Jim Evans가 창설한 'Sevan Annual Safety Excellence Awards'는 매년 사내 심포지엄에서 직원·고객·협력사·파트너 중 안전에 기여한 이들을 공개 표창하는 자리다.


한국 기업들이 참고해야 할 인사이트

2025년 수상 기업들의 안전 전략을 들여다보면, 한국 산업계가 벤치마킹해야 할 공통 원칙들이 뚜렷이 보인다.

① 경영진의 '현장 참여'가 문화를 만든다 KBR, 알바니, BL 하버트 모두 최고 경영층이 보고서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안전을 확인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전팀에게 위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리더가 안전의 얼굴이 되는 것이 핵심이다.

② 규모가 작아도 문화가 탁월할 수 있다 EHS 전문가가 2명뿐인 망간이 6,000건 이상의 자발적 안전 신고를 이끌어낸 것은 인원이나 예산이 아니라 '시스템과 신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많은 한국 제조·건설 분야에서 직접 적용 가능한 모델이다.

③ 안전의 범위를 신체 너머로 확장하라 아폴로의 정신 건강·자살 예방 프로그램은 한국 건설업 현장의 실정과도 맞닿아 있다. 산업재해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사망을 직접 다루기 시작한 것은 안전 경영의 새로운 지평이다.

④ 아차사고(Near Miss) 신고를 처벌이 아닌 보상으로 세반의 '1건당 7달러 기부' 방식은 소박하지만 강력한 행동 변화를 이끌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아차사고를 숨기는 문화가 남아 있는데, 이를 뒤집는 인센티브 구조 설계가 시급하다.

⑤ 안전을 UN SDGs와 연결하는 ESG 거버넌스 KBR이 10개 Zero Harm 지표를 UN의 지속가능개발목표와 연동한 것은 안전이 ESG 경영의 핵심 지표임을 보여준다. 한국 대기업들이 ESG 보고서에 안전 데이터를 어떻게 담을지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참고: EHS Today, America's Safest Companies 2025 (www.ehs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