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5일 화요일

직원 부정행위, 어떻게 탐지하고 막을 것인가

[해외 리스크 매거진 리뷰] 직원 부정행위, 어떻게 탐지하고 막을 것인가


출처 및 기고자 소개

2026년 4월 30일, 미국의 리스크 관리 전문 매체 RM Magazine에 주목할 만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제목은 "Going Rogue: How to Detect and Prevent Employee Misconduct", 직역하면 '이탈자: 직원 부정행위를 어떻게 탐지하고 막을 것인가'다. 기고자 Neil Hodge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리스크 관리·컴플라이언스·기업 지배구조 분야를 오랫동안 전문으로 취재해온 인물이다. 분량은 길지 않지만 조직 내 부정행위의 구조적 원인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으며, 탐지와 예방을 위한 실용적 관점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리스크 관리 실무자들에게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기사 요약

기사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직원이 선을 넘을 때, 그것은 정말 그 개인만의 문제인가?

Hodge의 답은 명확하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흔히 기업 스캔들을 고위 경영진의 대형 비리와 연결짓지만, 현실에서는 평범한 직원의 작은 규칙 위반에서 시작되는 사례가 훨씬 많다. 처음에는 사소해 보이는 일탈이 반복되고, 아무런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점차 대담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되돌리기 어려운 임계점을 넘어버린다. 이른바 '점진적 일탈(gradual drift)'의 메커니즘이다.

이 지점에서 기사의 핵심 논지가 선명해진다. 부정행위는 개인의 도덕성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조직이 설계한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과도한 실적 압박, 윤리보다 성과를 우선시하는 보상 체계, 묵인되는 작은 위반들, 내부 통제의 공백. 이런 환경이 조성되면 채용 단계에서 아무리 철저히 검증해도 사후 관리 없이는 의미가 없다. 기사는 배경 조사나 신원 조회 같은 사전 검증 방식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하며, 과거 기록만으로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은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성과 패턴 분석, 즉 재직 기간 전반에 걸친 체계적 접근이다.

그렇다면 어떤 신호에 주목해야 하는가. 기사가 제시하는 경고 지표들은 생각보다 구체적이다.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 설명이 어려운 높은 성과, 불필요한 접근 권한 요청,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 이유 없이 느려지는 업무 흐름. 특히 한 사람이 검토·승인·실행을 단독으로 통제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을 때 위험도는 급격히 높아진다. '프로세스 드리프트(process drift)', 즉 업무 절차가 서서히 변형되거나 우회되는 현상은 부정행위의 전형적인 전조임에도 현장에서 쉽게 묵과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역할에 대한 시각도 신중하다. AI와 데이터 분석이 이상 패턴 탐지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감시 체계의 과잉은 오히려 직원 불신을 심화시키고 우회 행동만 정교하게 진화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기사 속 한 문장이 이를 예리하게 짚는다. "정보가 많다고 예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과 그것을 행동으로 전환하는 것 사이의 간극, 그리고 감시와 신뢰 사이에서의 균형 감각을 동시에 요구하는 말이다.

예방 전략의 핵심은 구조와 문화의 정합성에 있다. 직무 분리, 이중 승인, 권한 분산은 부정행위 차단의 제도적 토대이며, 보상 체계를 재설계하여 윤리가 실적에 밀리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관리자에게는 경고 신호를 인식할 수 있는 훈련과 실제 개입 권한이 동시에 부여되어야 하며, 내부 신고 채널은 형식적 존재가 아닌 실질적으로 신뢰받는 통로여야 한다. 침묵하는 조직에서는 어떤 통제 시스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경영진이 투명성과 책임의 규범을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일탈이 은폐되지 않고 드러나는 환경이 형성된다.


리스크관리 인사이트

이 기사를 읽으며 가장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리스크 관리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리스크를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시장의 변동성, 규제의 변화, 자연재해, 공급망의 교란. 그러나 조직 내부에서 발생하는 행위 리스크는 그 성격이 다르다. 외부 리스크는 대개 예측 모델과 헤징 전략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리스크는 수치로 포착되기 이전에 이미 조직 문화 속에 잠복해 있다.

Hodge의 기사가 지적하는 핵심은 바로 이 '잠복성'이다. 부정행위는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작은 편의, 작은 예외, 작은 묵인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조직 내 비공식 규범으로 자리를 잡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상 자체가 감지되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마치 서서히 달궈지는 냄비처럼, 변화는 느리고 내부에서는 더욱 포착하기 어렵다.

이 맥락에서 리스크 관리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통제 시스템의 유무가 아니라, 그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많은 조직이 직무 분리, 이중 승인, 내부 감사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형식으로만 존재할 때, 통제가 있다는 착시가 오히려 실질적인 감시를 대체해버린다. 진정한 내부 통제는 서류상의 절차가 아니라, 그 절차가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기술에 대한 과잉 신뢰도 경계해야 한다. AI 기반 이상 탐지 시스템이나 행동 분석 플랫폼은 분명히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감시 인프라가 정교해질수록 조직은 '충분히 보고 있다'는 자기 만족에 빠질 위험이 있다. 데이터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고, 그 해석은 결국 사람이 속한 조직의 맥락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된다. 부정행위를 용인하는 문화 속에서는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도 무력화된다.

리스크 관리자에게 이 기사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조직에서 누군가 선을 넘으려 할 때,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려움에 기반한 통제는 감시가 사라지는 순간 작동을 멈춘다. 규정에 기반한 통제는 빈틈을 찾는 순간 우회된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규범에 기반한 통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작동한다. 리스크 관리의 목표가 단순한 손실 최소화를 넘어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 기반은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행동을 당연하게 여기며, 무엇을 용납하지 않는가에 있다.

부정행위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조직의 실패다. 그리고 그 실패는 대부분 오랫동안 예고되어 있었다.


2026년 5월 4일 월요일

AI가 사람을 해고할 수 있는가 — 중국 법원이 던진 질문

중국에서의 사건 요약

2025년, 중국 항저우의 한 IT 기업이 AI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품질관리 담당 직원 저우(Zhou) 씨에게 급여 40% 삭감을 통보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당신의 업무를 AI가 대신한다." 저우 씨가 이를 거부하자 회사는 해고를 단행했다.

항저우 중급인민법원은 이 해고를 위법으로 판결했다. 법원의 논리는 명쾌했다. 기술의 발전이 기업에게 일방적 해고나 임금 삭감의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단순한 노동 분쟁의 결론이 아니다. AI 시대의 고용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법정 위에 올려놓은 사건이다.


기술은 중립적인가

흔히 기술은 중립적이라고 말한다. 칼이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식사를 만들고, 범죄자의 손에 들리면 흉기가 된다는 식의 논리다. 그러나 이 비유는 기술이 사회 구조 안에 이미 특정 권력 관계를 내포한 채로 도입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AI 자동화는 단순히 "더 빠른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가치를 재정의하고, 협상력의 지형을 바꾸며, 누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가는지를 결정하는 구조적 힘이다. AI가 저우 씨의 업무를 대체했을 때, 생산성 향상으로 발생한 이익은 기업으로 귀속되었다. 그 이익을 만들어온 사람에게는 해고 통보가 돌아왔다. 이것이 중립인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기계제 대공업을 분석하며 지적했던 구조가 AI 시대에 재현되고 있다. 기계는 노동자의 적이 아니라, 자본이 노동자에 대항해 사용하는 수단이 된다는 통찰이다.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이 배치되는 방식과 그 이익이 분배되는 구조의 문제다.


효율성의 이데올로기

현대 경영학은 효율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AI 도입은 비용 절감, 오류 감소, 속도 향상이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들고 온다. 이 앞에서 인간 노동자는 "비효율의 잔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효율성은 무엇을 위한 효율인가. 효율성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무엇을 위해 효율적이어야 하는지, 그 목적에 대한 합의가 없다면 효율성의 극대화는 결국 인간을 비용 항목으로 환원시키는 논리로 귀결된다.

항저우 법원의 판결은 이 효율성의 이데올로기에 제동을 건 것으로 읽힌다. "효율적이기 때문에 해고할 수 있다"는 논리를 법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효율성의 계산식에 포함되지 않는 무언가 — 고용 관계의 신뢰, 사회적 안정, 개인의 존엄 — 가 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했다.


중국의 딜레마, 그러나 보편적인 긴장

중국은 지금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다. 국가 차원에서 AI 기술 패권을 추구하면서도, 청년 실업률 상승과 경기 둔화라는 현실적 압박 앞에 놓여 있다. 정책 자문기구에서조차 "AI로 인한 대규모 일자리 소멸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상황이다.

이 딜레마는 중국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2026년 이후 테크 업계에서만 약 8만 명이 AI를 이유로 일자리를 잃었다는 보도가 있다. 기술 혁신의 선두에 선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마주하는 모순이다. 더 강력한 AI를 개발할수록, 그 AI가 자국민의 고용을 위협하는 역설.

이 긴장은 단순히 "AI를 늦춰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발전의 속도와 사회 적응의 속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법원의 판결은 그 간극을 메우는 하나의 방식이다 — 사후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사회적 신호로서의 의미는 크다.


고용 관계란 무엇인가

철학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사건은 고용 관계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고용 계약은 단순한 서비스 교환인가. 노동자는 시간과 역량을 팔고, 기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거래. 이 틀 안에서 AI가 노동자보다 "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시한다면, 인간을 교체하는 것은 합리적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용 관계를 이렇게만 이해하면, 우리는 근대 노동법이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논리를 버리게 된다. 노동자는 단순한 생산 요소가 아니라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논리. 고용 관계에는 계약 이상의 사회적 의무가 포함된다는 논리. 이것이 해고 보호, 최저임금, 단체교섭권 같은 제도들의 철학적 기반이다.

AI는 이 기반을 흔든다. AI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피로를 느끼지 않으며, 임금 협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기업이 AI를 순수한 도구로, 그리고 인간 노동자를 비용 최적화의 변수로만 본다면 — 그 결말은 저우 씨의 사례처럼 40% 삭감 통보가 된다.

항저우 법원은 그 결말을 거부했다. 이는 AI를 도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AI 도입의 이익을 기업이 독점하면서, 그 비용은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앞으로의 물음

이 판결 이후에도 물음은 남는다. 법원이 AI를 이유로 한 해고를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AI가 서서히, 조용히, 새로운 채용을 대체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해고되지 않아도, 처음부터 고용되지 않는 세계는 또 다른 문제다.

기술은 계속 진보할 것이다. 그것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진보의 과실이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그리고 진보의 충격을 누가 감당하는가 — 이 배분의 문제를 시장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중국 법원의 판결은 그 배분에 대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하나의 답이다. 불완전하고, 사후적이며, 모든 경우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AI가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법이 거부한 순간, 우리는 적어도 이것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임을 확인했다.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우리는 AI로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알고리즘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


2026년 5월 3일 일요일

상장회사의 대표이사들은 로펌의 밥인가

영풍-고려아연, 쿠팡, 하이브 사태가 던지는 질문


다른 점 같은 점

2026년 초, 유독 비슷한 패턴의 기사들이 연달아 터졌다. 영풍과 고려아연은 '이그니오 투자 배임'을 두고 주주대표소송 전쟁을 예고했고, 쿠팡은 3,370만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미국 현지 로펌들의 집단소송 표적이 됐다. 하이브는 민희진 전 대표를 상대로 주주 간 계약 위반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세 사건의 무대와 당사자는 달라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표이사 혹은 경영진이 법정 피고석에 앉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상장회사의 대표이사는 이제 로펌의 먹잇감이 된 건 아닐까?


무엇 때문에 제소하는가

주주대표소송 — 회사를 대신한 복수

주주대표소송은 회사가 스스로 이사의 책임을 묻지 않을 때 주주가 나서서 회사를 대신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제도다. 이 소송에서 배상금이 인정되면 돈은 이사 개인이 아닌 회사로 귀속된다. 즉 이론적으로는 '회사와 전체 주주를 위한' 제도다.

영풍-고려아연 사건에서 영풍 측 주주들이 고려아연 이사진을 상대로 이 카드를 꺼내든 이유도 여기 있다. 이그니오 투자가 배임에 해당한다면, 그로 인해 회사가 입은 손해를 이사들이 직접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다. 표면상으로는 회사 이익을 위한 소송이지만, 현실에서는 경영권 분쟁의 연장전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법정이 지분 싸움의 또 다른 전장이 되는 것이다.

증권 집단소송 — 투자자 손실의 법제화

쿠팡 사건은 결이 다르다.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문제가 된 건, 쿠팡이 이를 SEC에 정정 공시한 이후에도 주가가 하락했다는 점이다. 미국 현지 로펌들이 즉각 소송에 뛰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의 증권 집단소송 시스템에서는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입은 투자자들이 집단을 이뤄 기업과 경영진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로펌은 성공보수 구조로 수임하기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하는 비용을 투자자가 선지급할 필요가 없으니, 로펌 입장에서는 '소송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라면 먼저 달려가는 게 합리적이다.

주주 간 계약 위반 — 신뢰의 사법화

하이브가 민희진 전 대표를 상대로 낸 소송은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핵심 쟁점은 '뉴진스 빼가기' 계획이 주주 간 계약을 위반했느냐였다. 법원은 중대한 위반이 없다고 판단해 민희진 측이 승소했지만, 이 소송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따로 있다. 경영진과 대주주 사이의 내밀한 신뢰 관계, 또는 그 균열이 이제 계약서와 법정을 통해 정산된다는 사실이다. 구두 합의와 암묵적 신뢰의 시대는 끝났다.


대리인 문제의 법정 이전

경영학에서 오래된 개념이 있다.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다. 주주(주인)와 경영진(대리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 대리인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할 유인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스톡옵션, 성과보수, 이사회 감시 같은 내부 거버넌스 장치였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다르다. 내부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않거나 지배주주 자신이 갈등의 당사자가 됐을 때, 주주들이 외부 수단, 즉 법원으로 직접 달려가고 있다. 주주대표소송과 집단소송은 사실상 외부화된 대리인 통제 메커니즘이다.

이것이 효율적인가? 단기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 소송 비용, 경영 불확실성, 핵심 인재의 이탈, 기업 이미지 훼손 등 부수적 피해가 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법적 책임의 위협이 경영진에게 주주 이익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억제하는 일종의 사전 억지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소송이 잦아질수록 경영진은 더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논리다.

그러나 여기에는 왜곡도 존재한다. 소송 리스크가 커질수록 경영진은 과감한 투자보다 무사안일한 의사결정을 선호하게 된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어적 경영이다. 고려아연 이그니오 투자가 배임인지 아닌지를 법원이 판단하게 됐을 때, 앞으로 다른 기업의 이사들이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투자를 얼마나 선뜻 결재하려 할까?


책임이란 무엇인가

이 소송들이 제기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경영의 실패는 도덕적 잘못인가, 아니면 불운인가?

배임죄의 핵심은 고의성이다. 결과가 나빴다고 해서 모두 배임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주주들은 손실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경영 판단의 실패로 귀결시키고, 법적 책임을 묻고 싶어 한다. 손실에는 반드시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이지만, 항상 공정한 귀인(attribution)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책임을 개인의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적 연결에서 찾았다. 그런데 대기업의 의사결정은 수백, 수천 명의 논의와 승인을 거친다. 대표이사 한 명이 '모든 것을 결정한 자'인가? 이 질문에 법원은 대부분 단순화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법은 복잡한 조직 현실을 개인의 책임으로 압축하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한편 로펌의 역할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분화된다. 로펌은 법의 집행자인가, 아니면 소송의 기획자인가? 미국에서 쿠팡을 향해 달려든 로펌들은 투자자 피해를 구제하는 정의의 수호자일 수도 있고, 집단소송 성공보수를 노린 수익 추구자일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은 동시에 옳다. 그리고 그 모호함 위에 현대 주주 소송의 생태계가 형성돼 있다.


법정 밖의 해답은 없을까

상장회사 대표이사가 로펌의 밥이 됐다는 표현은, 비유적으로는 틀리지 않다. 지배구조 갈등, 투자 실패, 계약 위반이 모두 법정으로 직행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나쁜 현상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책임 없는 경영이 방치됐던 시대보다는, 과도한 소송이 경영을 위축시키는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소송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소송이 거버넌스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고 주주와 경영진 사이에 신뢰와 소통이 살아있다면, 법정까지 가는 분쟁은 훨씬 줄어든다. 영풍과 고려아연이 법원 밖에서 합의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던 이유, 하이브와 민희진이 계약서 한 줄로 갈라선 이유를 생각해보면, 결국 이 소송들은 내부 거버넌스의 실패를 외부 사법 체계가 수습하고 있는 광경이다.

대표이사가 로펌의 밥이 되지 않으려면, 더 좋은 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더 좋은 이사회와 더 솔직한 주주 관계가 먼저다.


CATL의 나트륨이온 배터리가 열어가는 새로운 가능성

이젠 평화를 얻고 싶다

인류는 오랫동안 에너지를 둘러싼 전쟁을 치러왔다.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중동에서 피가 흘렀고, 리튬을 확보하기 위해 남미의 소금사막이 파헤쳐졌으며, 코발트를 캐내기 위해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광산으로 내몰렸다. 전기차가 미래라고 외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배터리를 만드는 원료를 놓고 세계 강대국들은 치열한 공급망 전쟁을 벌이고 있다. 배터리가 지구를 구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 배터리 때문에 또 다른 지구가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2026년 4월 말에 전해진 한 소식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중국의 배터리 기업 CATL이 에너지저장 기업 하이퍼스트롱과 3년간 총 60GWh 규모의 나트륨이온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현재까지 발표된 나트륨이온 배터리 협력 중 최대 규모다. 숫자만 보면 그저 또 하나의 대형 계약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 소식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읽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원을 둘러싼 오랜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작은 첫걸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트륨이온 배터리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하다. 나트륨은 지구 어디에나 있다. 리튬처럼 특정 국가의 특정 광산에서만 캐낼 수 있는 희귀 자원이 아니다. 소금에도 있고, 바닷물에도 있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 속에도 있다. 이 배터리가 진정으로 상용화된다면, 에너지 저장의 원료를 두고 국가가 군사력을 앞세워 협박하거나, 거대 자본이 광산을 통째로 사들여 가격을 흔드는 일이 줄어들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기술이 단순한 배터리 이상의 무언가라고 느낀다.

물론 현실은 아직 이상과 거리가 있다. 에너지 밀도가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낮기 때문에, 같은 크기와 무게로 더 많은 전기를 담을 수 있는 전기차 분야에서는 당장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렵다. 생산 비용도 현재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여전히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완벽하지 않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CATL은 이번 계약을 발표하면서 주요 공정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밝혔다.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포 문제, 수분에 취약한 특성, 에너지 밀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공개된 제품 사양을 보면, 300Ah 이상의 용량에 약 160Wh/kg의 에너지 밀도, 그리고 1만 5천 회 이상의 충·방전 사이클 수명을 확보했다. 영하 40도의 혹한에서 영상 70도의 폭염까지 작동이 가능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지금 이 기술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무대는 에너지저장장치, 즉 ESS 시장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으로 만든 전기를 낮에 저장해 두었다가 밤에 공급하고, 전력이 넘치는 계절에 모아두었다가 부족한 계절에 내보내는 그 장치 말이다.

이 시장에서는 에너지 밀도보다 안정성과 가격이 훨씬 중요하다. 나트륨이온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발열이 적고, 넓은 온도 범위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시스템 구조를 단순하게 설계할 수 있어 보조 전력 소비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기존 리튬이온 저장 시스템과 동일한 크기로 설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미 깔려 있는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새로 지을 필요 없이, 있는 것을 바꿔 끼우면 된다는 뜻이다. 설치 비용과 구축 기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기후 기술 전문 매체 클린테크니카는 이번 계약이 나트륨이온 배터리의 실제 시장 투입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실험실을 넘어, 현실 세계로 나왔다는 선언인 셈이다.


CATL이라는 기업을 나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본다. 거대 중국 자본이 뒤에 있고, 지정학적 셈법도 분명히 있을 것이며, 이 기업의 성장이 곧 기술 패권 경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창업자 쩡위친이 "테슬라도, 포드도, GM도 모두 우리에게 손을 벌렸다"고 말했을 때, 그 말 속에는 자부심만큼이나 날카로운 경쟁심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기업이 나트륨이온 배터리를 통해 만들어가려는 세계를 응원하고 싶다. 기업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더라도, 그 결과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밀어붙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때도 있다. 리튬 공급망을 쥔 나라가 세계를 움켜쥐는 구조, 광물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 기지가 세워지고 협정이 깨지는 구조, 그 구조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자원 전쟁의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나는 지쳐간다. 석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리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땅이 파괴됐는지. 이제는 조금 다른 세상을 꿈꿔도 될 것 같다. 소금처럼 흔하고, 바닷물처럼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 전기를 저장하고, 그 전기로 불을 켜고 차를 달리는 세상. 특정 누군가가 독점하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의 세상.

CATL의 60GWh 계약 하나가 그 세상을 바로 열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가는 길 위에 하나의 이정표가 놓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정표가 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원 전쟁이 끝나는 날,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이 소식을 기록해 둔다.


2026년 4월 29일 수요일

기후 인플레이션: 지구가 보내는 가격표

기후 변화를 환경 문제로만 바라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기후는 장바구니 물가를 직접 건드리는 경제 변수다. 학자들은 이를 '기후 인플레이션(Climateflation)'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중앙은행들은 이를 거시경제 리스크 분석 대상에 공식 편입했다. 조용히, 그러나 구조적으로, 지구는 우리에게 가격표를 내밀고 있다.


숫자가 먼저 말했다

2022년 유럽의 여름은 기록적이었다. 스페인은 46도의 폭염에 신음했고, 올리브 농장은 타들어 갔다. 영국에서는 폭염으로 닭 도축량이 9% 감소했다. 북이탈리아는 70년 만의 최악의 가뭄으로 쌀 수확이 급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기상 이변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의 기온 상승은 식품 물가를 연 0.7%포인트, 전체 소비자물가지수(CPI)를 0.3%포인트 끌어올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숫자는 냉정하다. 기후가 물가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데이터가 이미 증명했다.


25도라는 임계선

밀, 옥수수, 콩. 인류의 식탁을 지탱하는 주요 작물들은 평균 기온이 약 25도를 넘는 순간부터 생산성이 급격히 무너진다. 이 임계선은 단순한 농업 통계가 아니다. 지구 평균 기온이 조금씩 오를 때마다, 수확량 곡선은 반대 방향으로 꺾인다.

가뭄은 밭을 말리고, 해양 고온은 어장을 무너뜨리고, 폭풍은 수확 직전의 작물을 쓸어간다. 공급이 줄면 가격은 오른다. 경제학의 가장 오래된 법칙이, 기후라는 새로운 변수 앞에서 매년 반복되고 있다.


식품을 넘어, 전방위로 번지는 충격

기후 인플레이션의 파급은 식품에서 멈추지 않는다.

폭염이 오면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전기요금이 뛴다. 극단적 고온은 도로와 철로를 뒤틀어 물류 비용을 끌어올린다. 기후 재해가 반복될수록 보험사는 손실을 계산하고, 그 계산서는 보험료 인상이라는 형태로 기업과 가계에 전가된다.

이렇게 에너지, 물류, 보험이 동시에 오르면, 물가 압력은 특정 품목의 문제가 아닌 경제 전체의 구조적 비용 상승으로 전환된다. 기업의 원가 구조가 바뀌고, 그 변화는 결국 소비자 가격표에 새겨진다.


신흥국이 먼저 무너진다

기후 인플레이션의 충격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선진국 가계에서 식품이 차지하는 지출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신흥국과 저소득 국가에서는 식품이 소비 지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식품 가격이 오르면, 그 충격은 더 빠르고, 더 깊게 전달된다.

기후 변화는 지구적 현상이지만, 그 비용은 가장 취약한 곳에 가장 먼저, 가장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것이 기후 인플레이션이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한 이유다.


기대가 굳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중앙은행이 기후 인플레이션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후 충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물가는 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임금 협상에서 더 높은 인상률을 요구하고, 기업은 미리 가격을 올린다. 이렇게 기대 인플레이션이 자리를 잡으면, 물가 상승은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자기 실현적 구조로 굳어진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미 기온 상승이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공식 평가했다. 2035년까지 기후 요인만으로 CPI가 연 1.2%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통화정책의 전통적 도구로는 기후발 공급 충격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기업에게 기후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물가 문제가 아니다. 물류 우회 비용, 보험료 급등, 기후 노출 자산의 장기 손실 리스크가 원가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공급망을 다각화하고, 기후 리스크를 재무 모델에 반영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 됐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기후 인플레이션은 저축의 실질 가치를 갉아먹고, 생활비 부담을 구조적으로 끌어올린다. 단기적 재정 계획을 넘어, 기후 변수를 삶의 경제적 설계 안에 포함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기후 변화는 먼 미래의 환경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마트에서 집어 든 올리브유 가격에, 이번 달 전기요금 고지서에, 갱신된 보험 계약서에 이미 새겨져 있다. 지구는 오래전부터 가격표를 보내왔다. 우리가 이제야 그것을 읽기 시작했을 뿐이다.


2026년 4월 28일 화요일

2026년 1분기 북미 화물 절도 동향: 사칭 기반 조직범죄의 고도화

Insurance Journal의 2026년 4월 28일 자 보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미국과 캐나다 내 공급망 범죄 양상이 질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기간 발생한 화물 절도 사건은 총 767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5.3% 소폭 감소했으나, 추정 손실액은 약 1억 3,160만 달러 규모를 유지하며 건당 피해액은 오히려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지역별 발생 현황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범죄 다발 구역이었던 텍사스 및 남동부 지역의 활동은 위축된 반면, 주요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한 조직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255건→277건)와 뉴저지(27건→59건)의 사례에서 보듯, 물류 허브가 집중된 연안 지역의 치안 부담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품목별로는 개인 위생 및 뷰티 제품의 절도 사례가 18건에서 50건으로 세 배 가까이 급증했으며, 이는 북동부 지역 내 화장품과 향수의 높은 암시장 수요를 반영한다. 식음료 분야에서는 전반적인 음료 절도는 감소했으나, 해산물 등 고단가 식자재를 노린 표적 범죄는 오히려 크게 늘어났다.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범죄 수법의 지능화다. 단순 탈취를 넘어 피싱, 원격 트로이 목마, 합법 운송업체 사칭 등 ‘신원 도용’ 기반의 범죄가 핵심 유형으로 부상했다. 범죄 조직은 운송업체나 중개업체의 계정, 전화 시스템, 산업용 애플리케이션을 해킹해 합법적인 물류 프로세스에 침투하고 있다.

심지어 규제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합법적인 운송업체를 직접 인수하여 범죄의 교두보로 활용하는 치밀함까지 보이고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사칭 및 신원 악용 기반의 범죄가 향후 화물 절도 시장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될 것으로 전망하며, 물류 업계의 강력한 보안 인증 체계와 데이터 보호 전략이 시급함을 시사한다.

www.insurancejournal.com

과징금이 달라졌다 — 공정위, 담합의 값을 다시 매기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징금 부과 세부기준 등에 관한 고시」를 개정해 2026년 4월 30일부터 시행한다. 이번 개정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부과기준율 하한을 대폭 올렸다. 담합 적발 시 최소 부과기준율이 기존 0.5%에서 10%로, 중대한 담합은 3.0%에서 15%로 상향되며, 부당지원·사익편취의 경우 하한이 20%에서 100%로, 상한은 160%에서 300%로 올라 지원금액 전액 환수도 가능해진다. 다음으로 반복 위반에 대한 가중이 강화된다. 과거 5년 내 위반 전력 1회만으로도 최대 50%(기존 10%)까지 가중되고, 담합은 10년 내 전력이 있으면 최대 100%까지 가중된다. 마지막으로 감경 요소도 대폭 줄었다. 조사·심의 협조 감경 한도는 20%에서 10%로 축소되고, 자진시정 감경률은 최대 30%에서 10%로 낮아지며, 가벼운 과실에 의한 감경 규정은 아예 삭제된다. 공정위는 이번 개정을 통해 법 위반을 기업 전략으로 삼는 관행을 차단하고, 민생침해 담합을 근절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2026년 4월 25일 토요일

셸(Shell)은 왜 전 세계 법정에서 동시에 싸우고 있는가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 중 하나인 셸(Shell, LSE: SHEL)이 요즘 법정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나이지리아 — 대륙을 가리지 않고 7건 이상의 기후·환경 소송이 동시다발로 진행 중이다. 이 소송들은 단순히 한 기업을 겨냥한 법적 공방이 아니다. 화석연료 산업 전체의 미래, 그리고 우리가 기업의 책임을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시대적 질문이다.


1. 가장 중요한 소송 — 법정에서 기후 과학을 이긴 날

2021년 5월 26일, 네덜란드 헤이그 지방법원은 역사에 남을 판결을 내렸다. 환경단체 밀리우데펜시(Milieudefensie, Friends of the Earth 네덜란드)와 17,000명 이상의 시민이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셸에게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45% 감축하라고 명령했다.

민간 기업에게 구체적인 탄소 감축 수치를 강제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원은 이렇게 밝혔다. "셸은 혼자서 이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셸이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개별적 부분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셸은 즉각 항소했고, 2024년 11월 헤이그 항소법원은 구체적인 45% 수치는 부과할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언론은 셸의 승리라 보도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항소법원은 중요한 단서를 달았다. "셸과 같은 대형 에너지 기업도 기후 보호 의무를 진다"는 원칙 자체는 인정한 것이다. 더 나아가, 새로운 유전에 대한 투자가 셸의 주의 의무와 충돌할 수 있다고 암시하기도 했다.

밀리우데펜시는 2025년 2월 네덜란드 대법원에 재상고했고, 5월에는 셸의 신규 유전 700개 개발 계획을 근거로 새 소송까지 준비 중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 이사진을 직접 법정에 세우려 했던 시도

2023년, 환경법 전문 NGO 클라이언트어스(ClientEarth)는 전례 없는 도전을 했다. 셸의 주주 자격으로 셸 이사회 전원을 피고로 하는 파생소송을 영국 고등법원에 제기한 것이다.

핵심 주장은 이랬다. 셸의 기후 전략이 워낙 허술해서, 이사들이 영국 회사법상 자신들에게 주어진 리스크 관리 의무(fiduciary duty)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셸의 당시 계획대로라면 2030년까지 순배출량이 고작 5%밖에 줄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NEST, 스웨덴 연금 AP3 등 기관투자자 1,200만 주 보유자들이 소송을 지지했다.

결과는 기각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남긴 메시지는 강렬하다. 기업 이사진이 기후 리스크를 소홀히 관리했다는 이유로 직접 법정에 서야 할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앞으로 유사한 소송이 더 많이 제기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30년 묵은 상처 — 나이지리아 오염의 진실

시간을 1995년으로 돌려보자. 나이지리아 군사정권이 환경운동가 켄 사로-와이와(Ken Saro-Wiwa)를 포함한 '오고니 9인(Ogoni Nine)'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들의 죄목은 셸의 니제르 삼각주 석유 개발에 반대한 것이었다.

사로-와이와 가족은 셸이 군에 물자와 정보를 지원하고 증인을 매수했다는 혐의로 1996년 미국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12년 뒤인 2009년, 셸은 1,550만 달러(약 200억 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숫자가 말해주었다.

오늘날 니제르 삼각주의 상황은 더 복잡하다. 오갈레와 빌레 공동체 주민 약 5만 명이 현재 런던 고등법원에서 셸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2011년 유엔환경계획(UNEP) 보고서가 밝힌 오갈레 지역의 지하수 벤젠 농도는 WHO 기준의 900배였다. 2025년 6월, 영국 법원은 셸의 절차적 항변을 기각하고 본안 심리로 나아갔다. 이 소송은 이제 본격적인 막이 오른 셈이다.


4. 광고 한 편이 불러온 나비효과

2022년, 셸은 친환경 이미지를 강조하는 TV·유튜브 광고를 방영했다. 풍력발전, 전기차 충전소, 미래 에너지 — 화면은 온통 녹색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셸 전체 투자의 약 68~70%는 여전히 석유·가스에 쏠려 있었다.

시민단체 '광고금지도시(Adfree Cities)'의 신고로 영국 광고표준청(ASA)은 조사에 나섰고, 2023년 6월 광고 방영 금지를 명령했다. 소비자들이 셸의 저탄소 활동 비중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셸은 2024년 광고에서는 투자 비중을 자막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꿨고, ASA는 이번엔 문제없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다. 셸의 실제 재생에너지 투자 비율은 13.3%인데, 광고에서는 23%라고 표기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린워싱은 이제 광고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리스크가 됐다. EU의 기업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이 본격 시행되면, 이 전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5. 모든 소송이 던지는 하나의 질문

이 7개의 소송을 관통하는 공통된 질문이 있다.

기업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후 위기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져야 하는가?

10년 전이라면 황당한 소리로 들렸을 이 질문이, 이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법학자들이 진지하게 다투는 법정의 쟁점이 됐다. 그리고 법원들은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그렇다"는 방향으로 답을 내놓고 있다.

2021년 네덜란드 판결은 파기됐지만, 항소법원조차 "셸은 기후 보호 의무를 진다"는 원칙은 인정했다. 나이지리아 오염 소송은 다국적 기업이 해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본국에서 책임질 수 있다는 판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사회 소송은 기각됐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이미 기후 리스크를 주주가치와 직접 연결해서 보기 시작했다.


6. 투자자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첫째, 소송 비용은 빙산의 일각이다. 직접적인 벌금이나 합의금보다, 불확실성이 기업 가치에 미치는 할인 효과가 더 크다. 소송이 장기화될수록 셸의 신규 사업 투자 결정이 불확실해지고, 이는 중장기 수익성에 영향을 준다.

둘째, 규제 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EU CSRD, 영국 회사법 해석 변화, 각국 기후 소송 판결 축적 — 이 모든 것이 에너지 기업의 영업 환경을 재편하고 있다. 셸이 오늘 짜는 사업 계획이 5년 후에도 유효하다는 보장이 없다.

셋째, 에너지 전환의 속도가 관건이다. 셸이 재생에너지 투자를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빠르게 늘리느냐가 향후 소송 리스크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광고로 이미지를 관리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마치며

셸의 기후 소송 사례들은 ESG가 단순한 마케팅 용어가 아님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환경·사회·지배구조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기업은 어느 날 갑자기 법정에 서게 될 수 있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지구 반 바퀴를 돌아다니며 동시에.

셸이 지금 법정에서 어떤 답을 내놓느냐는, 앞으로 수십 개의 에너지 기업들이 따라가야 할 길을 만들어갈 것이다.


본 포스트는 공개된 법원 자료, 환경 단체 보고서,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투자 조언이 아니며, 구체적인 투자 판단은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Milieudefensie, ClientEarth, Corporate Accountability Lab, Amnesty International, ASA, Climate Case Chart (Columbia Law School)


사이버 범죄 세계 3위 경제대국,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Munich Re Global Cyber Risk and Insurance Survey 2026이 드러낸 불편한 진실


사이버 범죄를 하나의 국가로 가정하면, 그 경제 규모는 세계 3위에 해당한다. 2028년까지 글로벌 사이버 범죄 피해 비용은 14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독일·일본·인도의 GDP를 합산한 규모를 넘어선다. 이 숫자를 처음 접했을 때 느끼는 감각은 충격이라기보다 일종의 무감각에 가깝다. 너무 크기 때문에 실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Munich Re가 20개국 9,500명 이상의 C레벨 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Global Cyber Risk and Insurance Survey 2026」은 바로 그 무감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AI는 기회이자, 새로운 공격 벡터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AI의 부상이다. 2026년 기준, C레벨 응답자의 71%가 AI를 비즈니스에 유의미한 기술 트렌드로 꼽았다. 2024년의 62%에서 또 한 번 상승한 수치다. 클라우드(52%), 데이터 애널리틱스(53%), 블록체인(24%)을 제치고 AI가 독보적 1위를 차지한 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경영 전략의 핵심 축이 실질적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AI에 대한 태도다. 응답자의 66%가 AI가 자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상했고, 62%는 기술 자체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이미 57%의 기업이 운영에 AI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낙관론 이면에 묻혀 있는 숫자가 있다. AI 도입과 관련한 최대 우려 사항으로 데이터 보안 및 프라이버시(52%), 부정확한 결과(42%), 사이버 공격(42%)이 나란히 상위를 차지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사이버 공격의 맥락이다. Munich Re 전문가들은 AI 툴의 대중화로 인해 사이버 범죄가 점점 더 자동화되고 '민주화'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고도의 기술 없이도 정교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는 특히 중소기업에 대한 위협을 증폭시킨다. "우리 회사는 너무 작아서 공격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은 이미 시효가 만료된 논리다.


우려는 높고, 대비는 낮다

전 세계 C레벨 임원의 60%가 자사에 대한 사이버 공격 가능성을 "우려" 또는 "매우 우려"한다고 답했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 수치가 80%에 달했고, 일본(70%), 프랑스(71%)도 높은 편이었다. 한국은 59%로 글로벌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숫자는 따로 있다. 전 세계 C레벨 응답자의 89%가 자사의 사이버 보안 보호 수준이 "충분하지 않다"고 자평했다. 이 수치는 2021년 81%에서 해마다 꾸준히 상승해 왔다. 위협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는데, 정작 방어 태세에 대한 자신감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방어를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로는 직원들의 낮은 보안 인식(40%), 전문 인력 부족(31%), 보안 솔루션 간 통합 및 상호운용성 부재(30%)가 꼽혔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조직의 문제라는 점이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무리 정교한 방어 시스템을 갖추더라도, 피싱 메일 하나에 속는 직원 한 명이 그 모든 것을 무력화할 수 있다.

실제 피해 경험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데이터 침해(25%), 비즈니스 중단(27%), 클라우드 서비스 장애(16%), 랜섬웨어(16%) 등 다양한 유형의 사이버 인시던트를 실제로 경험한 기업 비율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 수치와 '우려' 수치 사이의 격차는 점점 좁혀지고 있다. 즉,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현실적 경험이 우려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클라우드 의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단일 장애점

AI 도입률이 57%라면, 클라우드 서비스 의존율은 98%에 달한다. 오늘날 기업 운영의 사실상 전 영역이 클라우드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의존도는 새로운 유형의 시스템 리스크를 만들어낸다.

단 하루의 클라우드 서비스 중단이 일별 매출의 26~50%에 해당하는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는 응답이 27%였고, 11%는 51~90%에 달하는 대규모 손실을 예상했다. 클라우드 제공업체 하나의 장애가 수천 개 기업에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 즉 누적 리스크(accumulation risk)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악의적 공격이 아닌 단순한 기술 오류 하나가 글로벌 경제에 연쇄 충격을 가할 수 있다.


보험 시장의 역설: 수요는 충분한데, 공급은 닿지 않는다

이 모든 우려와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보험 시장에는 여전히 거대한 공백이 존재한다. 2026년 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응답자(52%)가 자사에 사이버 보험이 제안된 적이 없다고 답했다. 보험사가 시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수요 신호는 강렬하다. C레벨 임원의 43%가 사이버 보험 가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 수치는 2021년 35%에서 꾸준히 상승해 왔다. 기업들이 사이버 보험을 구매하는 주된 이유는 비즈니스 중단으로 인한 재정 손실 보전(48%), 배상책임 손실 보전(48%), 전문 대응 서비스 접근(43%) 순이다. AI 리스크를 커버하는 보험에 관심 있다는 응답도 63%에 달했다. 이는 단순한 리스크 전가 수단이 아니라, 사고 발생 시 전문적인 위기 관리 역량을 확보하려는 수요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통과 투명성이다. 많은 의사결정자들이 사이버 보험 상품의 보장 범위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구매를 망설이고 있다. 보험사 입장에서 이것은 위협이 아니라 기회다. 15년 이상 사이버 보험 시장을 이끌어온 Munich Re가 이 보고서를 통해 강조하는 메시지도 바로 이 지점이다. 사이버 리질리언스는 단순한 기업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과제이며, 보호 격차(protection gap)를 좁히는 것이 보험 산업 전체의 임무라는 것이다.


결론: "If"가 아니라 "How"의 문제

Munich Re 보고서의 표제가 "Not If, But How"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이버 공격이 발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질문은 언제, 얼마나 자주, 그리고 그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로 넘어간 지 오래다.

디지털화의 가속, AI의 확산, 클라우드 의존도의 심화는 동시에 사이버 공격의 표면적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조직의 89%가 스스로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현실에서, 사이버 보안과 사이버 보험은 더 이상 IT 부서의 전담 과제가 아니다. 이것은 경영진의 전략적 의제이자, 이사회가 정기적으로 논의해야 할 리스크 관리의 핵심 항목이다.

기술은 계속 진화한다. 위협도 함께 진화한다. 그 속도를 방어 태세가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간극을 메우는 것이 지금 이 시대 기업 리더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본 글은 Munich Re의 「Global Cyber Risk and Insurance Survey 2026」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조사는 Statista가 2025년 12월 20개국 9,500명 이상의 응답자를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Munich Re 내부 전문가들이 2026년 1~2월에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2026년 4월 21일 화요일

AI 워싱: 과장된 기술 주장이 만드는 법적·경영적 리스크

AI 워싱이란 무엇인가

AI 워싱(AI Washing)은 기업이 실제 AI 기술 수준을 부풀리거나,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AI 역량을 보유한 것처럼 속이는 기만적 마케팅 행위를 가리킨다.

기업들은 "차세대 인공지능이 우리 비즈니스를 혁신했다"는 식의 대담한 선언을 쏟아내지만, 실상은 허위이거나 심각하게 과장된 경우가 많다. AI라는 단어가 투자 유치와 브랜드 가치에 직결되면서, 마케팅 팀이 기술적 현실을 한참 앞질러 달리는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비즈니스 컨설턴시 Cruxy의 CEO Carrie Osman은 AI 워싱을 "과대 선전에 사로잡히고 비판적 검토가 결여된 시장의 증상"이라고 진단하며, 이사회가 "AI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문제가 심화된다고 지적한다.

컴플라이언스 자문사 De Risk Partners의 Ravi de Silva는 "모든 기업이 AI를 활용한다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과대 선전이 진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며 "이전 기술 사이클에서도 이런 패턴을 목격했다. 큰 약속, 빠른 자금 유입, 그리고 불충분한 감독이 반복된다"고 경고한다.


이 리스크가 부각된 계기: 실제 사례들

AI 워싱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형사 기소와 집행 조치로 이어지는 심각한 리스크임을 보여준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SEC의 첫 AI 워싱 집행 조치 (2024년 3월) SEC는 두 투자사가 독자적인 딥러닝 AI 모델을 기반으로 투자 전략을 운용한다고 고객과 잠재 투자자를 수년간 오도했다는 혐의로 첫 AI 워싱 집행 조치를 발표했다. 사실상 해당 모델은 존재하지 않았다.

AI 채용 스타트업 Joonko CEO 기소 (2024년 6월) SEC는 현재 폐업한 AI 채용 기업 Joonko의 CEO Ilit Raz를, 기술 역량에 대한 허위 증언으로 투자자들로부터 최소 2,100만 달러를 편취한 혐의로 기소했다. SEC 집행국장은 이를 두고 "'인공지능', '자동화' 같은 신조어를 동원한 구식 사기"라고 직격했다.

전자상거래 앱 Nate의 CEO 기소 (2025년 4월) FBI와 연방검찰은 전자상거래 기업 Nate의 전 CEO Albert Saniger를, 쇼핑 앱의 AI 역량을 과장해 투자자들로부터 4,000만 달러를 편취하려 한 혐의로 기소했다. Saniger는 Nate 앱이 "AI 기반으로 완전 자동화되어 인간의 개입 없이 온라인 거래를 처리할 수 있다"고 홍보했지만, 실제 자동화 수준은 사실상 0에 가까웠고 필리핀 콜센터 직원 수백 명이 수동으로 거래를 처리하고 있었다.

아마존 Just Walk Out 논란 (2024년) Amazon Fresh·Amazon Go 매장에 도입된 'Just Walk Out' 기술은 AI 센서가 고객의 구매 물품을 자동 인식하고 청구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도 직원 약 1,000명이 거래의 4분의 3 가까이를 수동으로 검증하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며 비판을 받았다.

FTC의 'Operation AI Comply' (2024년 9월) FTC는 AI를 내세운 허위 광고와 사기를 단속하는 'Operation AI Comply'를 개시하고, 가짜 리뷰 생성 AI 도구, 'AI 변호사' 서비스, AI 기반 수익 창출을 표방한 사기 업체 등에 법적 조치를 취했다. 당시 FTC 위원장은 "AI 도구를 사용해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는 불법이며, AI라는 이름 아래 법 적용이 면제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한국 기업들에게 주는 메시지

이 일련의 사태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기업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AI"라는 단어는 이제 법적 책임을 수반한다.

투자 설명 자료, IR 보고서, 제품 마케팅 어디서든 AI를 언급하는 순간 그 주장은 검증의 대상이 된다. 법무법인 Pierson Ferdinand의 파트너 Maryam Meseha는 "기업의 공시 자료가 AI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잘못 표현한다면 증권 사기, 소비자 기만, FTC 위반으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 상장사나 미국 시장에 투자를 유치하는 기업이라면 이 리스크는 실질적이다.

둘째, 임원 개인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AI 관련 허위 진술에 대해 기업뿐 아니라 임원 개인도 소송, 과태료, 기타 규제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Nate CEO가 직접 기소된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셋째, EU AI Act는 한국 기업의 유럽 진출에도 적용된다.

2026년 8월 전면 시행되는 EU AI Act는 'AI' 또는 'AI 기반'이라고 표현된 제품을 규제 대상 AI 시스템으로 간주한다. 유럽 시장을 겨냥하는 한국 기업이 제품에 성급하게 'AI' 딱지를 붙였다간 막대한 컴플라이언스 비용과 규제 의무를 떠안게 된다.

넷째, 과장 광고는 기술 투자 자체를 망친다.

Park Place Technologies의 CTO Chris Carriero는 "과대 선전된 솔루션을 쫓다 보면 진정으로 효율과 혁신을 이끌 수 있는 실질적 AI 기술을 간과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AI 워싱은 외부 신뢰만 갉아먹는 게 아니라 내부의 기술 판단력과 투자 효율성도 훼손한다.

실천적 대응 방향

전문가들은 'AI 기반(AI-powered)' 대신 'AI 보조(AI-assisted)'와 같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AI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마케팅·법무·컴플라이언스 기능이 공개 발표를 사전 검토하고, AI 모델의 개발·검증·통합 과정에 대한 내부 문서를 체계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결국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가 AI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단어는 아직 쓸 준비가 안 된 것이다.


2026년 4월 14일 화요일

조직 분절이 초래하는 보안 리스크의 실체

팀 윌리엄스, 핑커턴 부회장 기고 요약

현대 기업의 보안 실패는 외부 공격보다 조직 내부의 단절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는 점을 팀 윌리엄스는 강조한다. 그는 감사, 사이버, 물리보안, 인사, 컴플라이언스 등 핵심 기능이 하나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을 때 가장 큰 취약점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내부 단절이 만든 실제 사고들

  • 내부 감사팀과 보안팀이 동일 직원을 서로 다른 혐의로 추적하면서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당 직원이 핵심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이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 시설 부서가 비용 절감을 이유로 검증되지 않은 장비를 설치해 네트워크 백도어가 생겼고, 결국 해킹으로 이어진 사례도 소개된다.

이 두 사례는 부서 간 사일로와 소통 부재가 직접적인 보안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결을 위한 네 가지 전략

윌리엄스는 조직이 단편적 대응을 넘어 통합적 보안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다음 네 가지 축을 제시한다.

  1. 목적 기반 설계
    보안 아키텍처는 기술이 아니라 조직의 핵심 목표에서 출발해야 한다.

  2. ROI에서 ROV로의 전환
    비용 중심의 ROI가 아닌, 조직 목표 보호의 가치를 기준으로 한 ROV 관점이 필요하다.

  3. AI의 중추신경계화
    부서별 개별 도입이 아닌, 다양한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AI 구조가 요구된다.

  4. 인간의 역할 재정립
    기술이 탐지 속도를 높여도, 분석·판단·윤리적 결정은 숙련된 인력이 수행해야 한다.

기고의 핵심 메시지

보안의 미래는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조직 내부의 균열을 치유하는 리더십에 달려 있다.
윌리엄스는 부서 간 협력 권한을 가진 중앙 리스크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현대 위협은 조직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방어 또한 기존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영국 CMA의 그린워싱 규제, 이제 공급망 전체가 타깃이다

수출기업이 반드시 알아야 할 2024년 환경 주장 규제의 핵심


"친환경", "재활용 가능", "탄소중립"

이 세 단어가 이제 기업에게 **전 세계 매출의 10%**를 날릴 수 있는 폭탄이 됐다.

2026년, 영국 경쟁시장청(CMA, Competition and Markets Authority)이 그린워싱(Greenwashing) 규제의 칼날을 대폭 강화했다. 변화의 핵심은 단 하나다. 책임의 범위가 브랜드에서 공급망 전체로 확대됐다.

한국 수출기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영국 또는 EU 시장에 제품을 납품하거나 유통하는 순간, 이 규제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


공급망 전체가 책임진다

기존에는 "우리는 제조사에서 받은 정보를 그대로 표기했을 뿐"이라는 해명이 어느 정도 통했다.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CMA 가이드라인은 환경 관련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원료 → 제조 → 유통 → 소매 → 브랜드로 이어지는 공급망 전 단계에 부과한다. 즉, 한국의 원료 공급사, 국내 제조사, 현지 유통업체, 그리고 최종 브랜드까지 모두 규제 대상이 된다.

규제 대상이 되는 표현도 단순한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지, 로고, 색상, 심지어 소비자에게 친환경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정보의 '생략' 까지도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 녹색 잎사귀 이미지 하나, "자연에서 온" 같은 문구 하나가 입증 자료 없이는 법적 리스크가 된다.


"검증 못 하면 쓰지 마라" — 입증 의무의 핵심

이번 규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명확하다.

모든 환경 주장은 기업 스스로 근거를 확보하고 문서화해야 한다.

공급업체가 "친환경 소재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혹은 제3자 인증서 하나를 받았다고 해서 의무가 끝나지 않는다. CMA는 이를 명시적으로 불충분하다고 규정한다.

기업이 스스로 다음을 해야 한다:

  • 환경 주장에 대한 과학적·통계적 근거 확보
  • 해당 근거의 문서화 및 내부 보관
  • 근거가 없거나 부족할 경우 주장 수정 또는 철회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면 제품 판매 자체가 법적 리스크가 된다. 규제 당국의 조사가 시작됐을 때 "몰랐다"는 변명은 더 이상 방어 논리가 되지 않는다.


과징금: 전 세계 매출의 최대 10%

숫자를 보면 이 규제가 얼마나 강력한지 실감할 수 있다.

2024년 제정된 법에 따라, 허위 또는 오해를 유발하는 환경 주장을 한 기업에는 다음 중 큰 금액이 과징금으로 부과된다:

  • 전 세계 연간 매출의 최대 10%
  • 30만 파운드(약 5억 원)

그리고 치명적인 조항이 있다. 고의성이 없어도 위반으로 간주된다. 담당자가 몰랐다고, 실수였다고 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소비자와 직접 접점이 있는 유통업체와 브랜드 기업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구조다. 한국 기업이 OEM·ODM 방식으로 납품하더라도, 제품에 환경 관련 표기가 들어간 순간 리스크를 완전히 외면하기 어렵다.


유통사도, 브랜드도 모두 제재 대상

책임 소재를 두고 "우리 잘못이 아니라 거래처 잘못"이라며 서로 미루는 상황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CMA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빨리 시정할 수 있는 주체를 중심으로 제재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 브랜드가 잘못된 환경 표시를 수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통업체가 판매를 계속했다면, 양측 모두 제재 대상이 된다.

거래 계약서에 환경 관련 책임 조항이 없다면, 지금 당장 검토가 필요하다.


글로벌 규제의 방향은 동일하다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EU: 그린 클레임 지침(Green Claims Directive) 추진 중
  • 미국 FTC: 친환경 마케팅 가이드라인 강화
  • 호주, 싱가포르, 한국: 환경 주장 입증 책임 강화 흐름 합류

다국적 기업, 그리고 다국적 시장에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이라면 국가별 차이를 파악하되, 가장 엄격한 기준에 맞춘 통합 검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이다. 시장마다 다른 기준을 개별 대응하는 전략은 비용과 리스크 양쪽에서 비효율적이다.


수출기업이 지금 해야 할 것

이번 규제 강화는 마케팅 문구 몇 개를 고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과 공급망 관리 전반을 재설계하도록 압박하는 구조적 변화다.

지금 당장 점검해야 할 사항:

  1. 자사 제품에 환경 관련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가? (문구, 이미지, 로고, 색상 포함)
  2. 해당 표현을 뒷받침하는 검증 자료가 문서화되어 있는가?
  3. 공급업체로부터 받은 환경 관련 주장을 자체 검증했는가?
  4. 유통·판매 계약서에 환경 표시 관련 책임 조항이 명시되어 있는가?
  5. 수출 대상국의 그린워싱 규제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가?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대응이 필요하다.


그린워싱 규제는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기업 생존과 직결된 법적 리스크다. 영국 CMA의 이번 가이드라인은 그 시작점에 불과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수출기업이라면, 환경 주장에 대한 검증 체계를 지금 구축해야 한다.


본 포스팅은 영국 CMA 그린워싱 가이드라인 및 관련 규제 동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26년 4월 9일 목요일

기업 회복력(Enterprise Resilience)이 조직의 미래를 결정한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다. 팬데믹, 기후 위기, 사이버 공격, 지정학적 갈등, 급격한 기술 변화까지 — 조직을 흔드는 충격의 종류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그 강도는 점점 세진다. 이런 환경에서 단순히 리스크를 줄이거나 피하는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싱가포르국립대학교(NUS) 리스크 관리 팀이 리스크 매니지먼트 매거진(RIMS)에 기고한 글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기업 회복력(Enterprise Resilience)**을 제시한다.

회복력이란 단순히 위기에서 살아남는 능력이 아니다. 충격을 흡수하고, 신속하게 회복하며, 나아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더 강해지는 능력이다. 이 글은 그 회복력을 다섯 가지 핵심 영역으로 분해하고, 실제로 강화하기 위한 일곱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이론이 아니라 조직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실천적 프레임워크다.


회복력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축

1. 디지털 회복력 — 사이버 위협과 기술 변화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조직의 디지털 의존도는 높아지고, 그만큼 사이버 위협에 노출되는 표면적도 넓어진다. 랜섬웨어 공격 한 번으로 핵심 업무가 마비되거나, 클라우드 서비스 장애 하나로 전체 운영이 멈추는 사례는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디지털 회복력은 이런 위협을 전제로, 견고한 IT 인프라와 보안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이버 침해를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정기적인 보안 점검, 데이터 백업 체계, 침해 대응 시나리오 훈련이 여기에 포함된다.

2. 기술적 회복력 — 신기술을 안전하게 내재화하는 능력

AI, 머신러닝, 자동화 기술은 조직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새로운 리스크를 만들어낸다. 기술적 회복력은 단순히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조직 안에 통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AI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을 도입했을 때, 그 시스템이 오작동하거나 편향된 결과를 낼 경우 이를 감지하고 수정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기술 자체보다 기술을 운용하는 조직의 역량이 회복력의 본질이다.

3. 운영 회복력 — 위기 속에서도 핵심 기능이 멈추지 않는 구조

자연재해, 공급망 붕괴, 핵심 인력 이탈 등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직의 핵심 기능이 어느 수준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 운영 회복력은 이 질문에 답하는 영역이다.

핵심은 사전 준비다. 다양한 위기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대응 계획을 미리 수립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 계획이 작동하는지 정기적으로 테스트하는 것이 요구된다. 단일 공급업체에 의존하지 않는 공급망 다변화, 원격 근무 체계 구축, 핵심 프로세스의 문서화도 운영 회복력을 높이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4. 재정적 회복력 — 위기를 버티는 재무적 체력

아무리 전략이 뛰어나도 재무적 기반이 흔들리면 조직은 무너진다. 재정적 회복력은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고, 재무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위기 상황에서도 핵심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재무적 여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수익 극대화보다 장기적 재무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의사결정 기준이 필요하다. 부채 수준 관리, 비용 구조의 유연성 확보, 다양한 수익원 개발 등이 재정적 회복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5. 인재 회복력 — 변화를 이끄는 사람을 키우는 것

결국 회복력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조직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인재 회복력은 학습 능력, 창의성, 팀워크를 갖춘 민첩한 인력을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변화에 저항하지 않고 적응하는 문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험하는 분위기, 그리고 조직 전체가 지속적으로 배우고 성장하는 구조가 인재 회복력의 핵심이다. 개인의 역량뿐 아니라 팀과 조직 차원의 집단 지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회복력을 실제로 키우는 7가지 전략

핵심 영역을 이해했다면 이제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가 문제다. 글은 조직이 회복력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일곱 가지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전략 1. 리스크 관리 라이프사이클에 회복력을 통합하라

회복력은 별도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기존 리스크 관리 프로세스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 리스크 식별, 평가, 대응, 모니터링의 모든 단계에서 회복력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나리오 계획을 통해 다양한 위기 상황을 사전에 그려보고,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해 의사결정의 속도와 정확성을 높여야 한다.

전략 2. 적응형 리더십과 회복적 조직문화를 구축하라

리더가 불확실성 앞에서 경직되면 조직 전체가 경직된다. 적응형 리더십은 변화를 위협이 아닌 기회로 읽고, 조직이 새로운 방식을 실험할 수 있도록 심리적 안전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부서 간 사일로를 허물고 횡적 협업을 촉진하는 구조적 장치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전략 3. 지속적 학습과 역량 강화에 투자하라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어제의 역량이 오늘의 경쟁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조직은 구성원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학습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직무 교육을 넘어, 미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역량 개발 체계를 의미한다.

전략 4.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이해관계자 참여를 강화하라

위기 상황에서 정보의 흐름이 막히면 조직은 빠르게 혼란에 빠진다. 내부 구성원 간의 명확한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물론, 고객·파트너·규제기관 등 외부 이해관계자와의 신뢰 관계도 회복력의 중요한 자산이다. 다중 채널 소통 체계를 구축하고, 위기 시 무엇을, 누가, 어떻게 소통할지를 미리 설계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전략 5. 측정과 피드백 메커니즘을 갖춰라

회복력을 높이겠다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얼마나 개선되고 있는지를 측정해야 한다. 회복력 수준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지표를 설정하고, 정기적인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현재 취약점을 파악하며, 실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후 검토를 통해 교훈을 도출하고 반영하는 피드백 루프가 핵심이다.

전략 6. 조직의 맥락과 성숙도에 맞는 맞춤형 접근을 취하라

모든 조직에 동일한 회복력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산업의 특성, 조직의 규모, 현재 리스크 관리 성숙도에 따라 우선순위와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산업 기준과 비교해 현재 조직의 성숙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맞는 단계적 개선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다.

전략 7. 장기적이고 반복적으로 회복력을 개발하라

회복력은 단기 프로젝트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직의 전략적 계획 주기 안에 회복력 개발을 내재화하고, 환경 변화에 맞춰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하는 반복적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오늘의 회복력이 내일의 회복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조직 전체에 자리 잡아야 한다.


회복력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 글이 남기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명확하다. 회복력은 한 번 구축하면 끝나는 고정된 목표가 아니다. 조직 전체가 협력하고, 기술과 문화적 기반 위에서 끊임없이 진화시켜야 하는 지속적·적응적 프로세스다.

충격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충격을 흡수하고, 빠르게 회복하며, 더 강한 조직으로 거듭나는 것은 가능하다. 디지털·기술·운영·재정·인재라는 다섯 가지 축을 균형 있게 강화하고, 일곱 가지 전략을 조직의 맥락에 맞게 적용할 때 기업 회복력은 단순한 개념을 넘어 실질적인 경쟁력이 된다.

불확실성의 시대, 살아남는 조직과 도태되는 조직의 차이는 결국 회복력을 얼마나 진지하게, 얼마나 체계적으로 키워왔는가에 달려 있다.


참고: Hazel Mak, Sit Yiwen, Teng Yixin — "Improving Organizational Sustainability Through Enterprise Resilience", Risk Management Magazine (RIMS), 2026년 4월 9일 원문 링크: rmmagazine.com


2026년 4월 7일 화요일

순수 미술품 보호를 위한 위험 관리 전략

Andrea DeField — Hunton Andrews Kurth LLP 보험회수 그룹 파트너 
Charlotte Leszinske — 같은 그룹의 어소시에이트 

핵심 요약

1. 예술품은 고유한 위험에 노출된다

예술품은 미적·재정적 가치를 지니지만, 운송 중 분실·손상, 도난, 고의적 훼손, 위조 등 다양한 위험에 취약하다.
따라서 전체론적·미래지향적 위험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2. 보험은 리스크 관리의 출발점

보험 약관 검토, 보장 범위 확인, 문서화, 감정·출처 기록, 대여 시 상대방 보험 검증 등은 필수 절차로 제시된다.
보험사가 요구하는 사전 조치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보장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3. 운송은 가장 큰 위험 요인

미술품 보험 청구의 약 50%가 운송 중 손상·분실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근거로, 전문 운송업체 선정, 기후 제어 장비, 창고 보안, 운송 전 상태 보고서 작성 등을 핵심 요소로 제시한다.

4. 자연재해 대비

보관 장소의 화재·홍수·강풍 위험 평가, 대체 보관소 확보, 백업 전력 및 보안 시스템 구축 등 재난 대비 전략이 필요하다.

5. 손상 발생 후의 대응

손상 발생 시에는

  • 추가 피해 방지
  • 보험사 신속 통지
  • 철저한 문서화

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부분 손실·전손 판단, 감정 절차, 가치 산정 방식 등도 초기 단계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6. 보험사·중개인·전문가와의 협업

보험사는 최근 위험 식별 및 완화 도구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정책 조건에 따라 특정 조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따라서 보험사·중개인·전문가·보존업체와의 긴밀한 협업이 종합적 보호 체계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결론짓는다. 


결론

이 기고는 예술품을 단순한 자산이 아닌 복합적 위험에 노출된 고가치 투자재로 바라보며, 보험·운송·보관·재난 대비·사후 대응을 아우르는 통합적 리스크 관리 전략을 제시한다.
특히 법률·보험 전문가의 관점에서 정교한 절차와 문서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 돋보인다.


  • Andrea DeField — Hunton Andrews Kurth LLP 보험회수 그룹 파트너 
  • Charlotte Leszinske — 같은 그룹의 어소시에이트 

두 필자는 예술품 관련 보험·리스크 관리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법률가로, 예술품 손실 예방과 보험 청구 전략을 중심으로 실무적 조언을 제시한다.

https://www.rmmagazine.com/articles/article/2026/04/07/risk-management-strategies-for-protecting-fine-art?utm_campaign=shareaholic&utm_medium=copy_link&utm_source=bookmark


2026년 4월 4일 토요일

대전 자동차부품 공장 화재의 반추

복합 실패의 해부와 산업 안전 재설계를 위한 고찰


프롤로그: 재난은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재난 공학(Disaster Engineering)의 오래된 명제가 있다. "대형 사고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스위스 치즈 모델(Swiss Cheese Model)로 잘 알려진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의 이론은 재난이란 여러 겹의 방어막에 뚫린 구멍들이 일직선으로 정렬될 때 비로소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2026년 3월 20일 대전 대덕구에서 발생한 화재는 그 이론의 정확한 실물 교훈이었다.

오후 1시 17분, 자동차 및 선박용 엔진 밸브를 제조하는 3층 규모의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건물 내부에는 170명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사망자 14명, 부상자 60명 등 7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불길은 신고 접수 후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국가소방동원령이 발령될 만큼 빠르게 확산됐고, 인근 충남·충북·세종의 인력과 장비, 중앙119구조본부의 무인소방로봇, 대용량포 방사시스템, 산림청 헬기까지 투입되었음에도 완전 진화까지는 10시간 30분이 소요됐다.

이 글은 그 10시간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술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리고 산업 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1. 발화와 확산 — 공장 내부 연소 환경의 구조적 취약성

화재의 정확한 발화 원인은 수사 중이나, 확산의 속도와 규모를 규정한 조건들은 이미 파악되어 있다.

절삭유 슬러지와 유증기 — 보이지 않는 연료

소방서장은 "가공 공정에서 절삭류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기름때가 천장 등에 남아 있고, 집진 설비나 배관에도 슬러지가 다량 존재한다"며 "미상의 원인으로 발생한 불이 그것을 타고 순식간에 연소 확대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금속 가공 공장에서 절삭유(Cutting Oil)는 공정의 핵심 매개다. 선반, 밀링, 연삭 등의 공정에서 발생하는 마찰열을 냉각하고 가공면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대량으로 사용된다. 문제는 이 절삭유가 공기 중에 미세하게 기화되어 유증기(Oil Mist)를 형성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진 덕트 내벽, 천장 구조물, 배관 슬리브에 산화 피막을 형성하며 누적된다는 점이다. 이 누적된 유분층은 사실상 공장 내부 전체에 연소 촉진제를 도포해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동조합 위원장은 화재 직후 언론 브리핑에서 "노조는 그간 산업안전보건회의 등을 통해 집진시설과 공조·배관 등 화재 위험 요소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선을 요구해왔으며, 특히 유증기와 기름 찌꺼기 등이 축적될 가능성을 지적하며 주기적인 점검과 청소 필요성을 제기해왔다"고 밝혔다. 이는 위험 요인이 현장 내부에서 이미 인지된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샌드위치 패널 — 반복되는 비극의 소재

화재가 발생한 건물은 2010년 지상 1층으로 신축된 후, 2011년 1층이 증축되고 2014년 2~3층이 추가 증축되어 현재의 3층 구조가 완성됐다. 건물은 철골 구조를 기반으로 벽면과 지붕이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되어 있다.

샌드위치 패널은 얇은 철판 두 장 사이에 단열재를 삽입한 복합 구조재다. 시공 단가가 낮고 시공 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로 국내 공장·물류·농업 시설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내부 단열재에 불이 붙으면 철판이 열 차폐막 역할을 하여 외부에서 물을 뿌려도 내부 연소가 차단되지 않는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다. 2024년 23명이 숨진 경기 화성 아리셀 화재에서도 샌드위치 패널 구조물이 피해를 키운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 바 있다. 동일한 경고가 반복되었음에도 규제 개선은 뒤따르지 않았다.


2. 금속 나트륨 — 위험물 관리 체계의 허점

이번 화재에서 진화 작업을 가장 직접적으로 지연시킨 요인은 현장에 보관되어 있던 금속 나트륨(Metallic Sodium)이었다.

나트륨 봉입 중공 밸브의 기술적 맥락

중공 밸브(Hollow Valve)는 내부가 비어 있는 구조로, 경량화를 통해 엔진의 고속 회전 추종성을 높이고, 내부에 금속 나트륨과 같은 냉매를 봉입하여 연소실의 높은 열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고성능 부품이다. 특히 하이브리드 차량과 고출력 가솔린 엔진에서 밸브 온도 관리는 내구성과 직결되므로, 나트륨 봉입 중공 밸브는 현재 자동차 엔진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부품이다. 금속 나트륨은 이 공정에서 내부 냉각재로 사용되며, 제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공장 내에 보관된다.

그런데 금속 나트륨은 물과 반응하면 수소 가스를 발생시키며 격렬하게 연소·폭발하는 1류 위험물이다. 화재 현장에는 금속 나트륨 101kg과 나트륨 폐기물 2드럼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소방당국은 초기 진화 과정에서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나트륨을 안전한 장소로 먼저 이동시키는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화재 발생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나트륨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 1시간 30분은 불길이 건물 전체를 장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프링클러의 부재 — 법적 공백과 구조적 모순

화재 당시 해당 공장은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 2021년 개정된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장의 경우 4층 이상이면서 모든 층의 바닥면적이 500제곱미터 이상인 곳에만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다. 3층 구조였던 이 건물은 해당 기준에 미달했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설치되어 있던 스프링클러마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재 발생 약 한 달 전인 2026년 2월, 화재가 발생한 3층 구역에서 불법 나트륨 정제소가 운영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방당국이 조치 명령을 내려 2월 24일 완료 확인을 받았으나, 원래 옥내 주차장으로 승인된 해당 구역에 나트륨 정제소를 운영하면서 스프링클러를 차단해둔 상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단순한 관리 부주의가 아니다. 소방 설비를 의도적으로 비활성화한 상태에서 고위험 물질 공정이 운영되었던 것이다. 전년도 10월 소방 자체 점검에서 주펌프와 충압펌프의 압력 미달이 지적되어 시정 명령이 내려졌던 사실까지 감안하면, 소방 설비의 작동 불량은 이미 예고된 위험 신호였다.


3. 점심시간의 역설 — 피난 조건의 구조적 취약성

화재는 오후 1시 17분, 170명의 근무자 대부분이 점심 식사 후 휴식 중이던 시각에 발생했다. 소방서장은 "점심시간 중이라 아마 휴게소 쪽에 많이 계실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사실은 산업 현장 비상 대피 체계의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대피 훈련과 비상 연락 체계는 '작업 중' 시나리오를 전제로 설계된다. 담당자가 각 구역에 배치되어 있고, 지휘 계통이 작동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그러나 점심시간·교대 시간대는 근무자들이 생산 라인에서 이탈하여 공간적으로 분산된 상태다. 휴게실, 식당, 화장실, 흡연 구역 등 다양한 위치에 흩어진 근무자들에게 일괄적인 대피 지시가 전달되는 데는 구조적인 지연이 발생한다.

목격자는 "2층에서 계속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창문 쪽으로 30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바깥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대피로가 연기와 화염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창문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는 것은, 실내 비상 탈출 경로의 설계가 실제 화재 시나리오에 부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4. 공급망의 연쇄 충격 — 단일 공급망 의존의 위험성

이 화재가 국내 제조업 전반에 충격을 준 이유는 단순히 피해 규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공장 화재가 국내 완성차 생산 라인 전체를 멈추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공급망 구조의 취약성이 핵심이었다.

해당 공장은 연간 7만 개에 달하는 엔진 밸브를 생산하며 국내 자동차 산업의 핵심 공급 축을 담당해왔다. 특히 하이브리드 차량용 중공 밸브 등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는 부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동일한 품질의 부품을 단기간에 대체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파급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카파 엔진(1.0L 자연흡기·1.6L 하이브리드)과 2.5L 세타3 엔진에 탑재되는 밸브 공급이 끊기면서, 모닝·레이를 위탁 생산하는 동희오토는 4월 1일부터 13일까지 전면 생산을 중단했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전 차종, 아반떼 하이브리드, 그랜저 2.5L, 싼타페 2.5T, 팰리세이드의 생산을 6월까지 중단한다고 밝혔으며, 기아 화성공장도 3월 27일 생산을 중단했다.

자동차 산업의 공급망은 본질적으로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방식으로 운영된다. 재고를 최소화하고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시점에 공급받는 이 방식은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한 전략이지만, 공급망 내 단일 지점의 이탈이 전체 생산 흐름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결정적 취약성을 내포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반도체 공급난이 자동차 생산 라인을 멈췄을 때 이미 이 구조의 위험성이 전 세계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럼에도 핵심 부품의 단일 공급망 구조는 여전히 관행으로 유지되어 왔다. 이번 사태는 단일 협력사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국내 자동차 공급망의 안정성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5.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한 것들 —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반복된다

이번 화재 이후 소방방재학과 교수들, 건축 전문가들, 노동 현장 관계자들, 그리고 정부 당국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 발언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결론은 하나였다. 이것은 예외적인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예고된 결과라는 것이다.

"면적이 아니라 위험도로 관리했어야 했다"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소방 관리 기준의 설계 방식이었다. 전문가들은 해당 공장이 폭발성이 강한 나트륨을 취급하는 위험물 허가 업장이었음에도 '화재안전 중점관리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중점관리대상은 연면적 3만㎡ 이상 시설을 기준으로 지정되는데, 사고 공장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면적 기준이 아니라 위험도 기준으로 관리했어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 지적의 핵심은 단순하다. 지금의 제도는 얼마나 큰 건물인가를 보지, 얼마나 위험한 공장인가는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층 사무 건물과 나트륨을 다루는 금속 가공 공장이 같은 잣대로 관리되는 구조가 이번 참사를 법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민간에 점검을 맡기면 형식이 된다"

이 공장의 소방 점검은 연 2회, 사측이 지정한 민간 점검업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준에 그쳤다. 공공기관의 상시 감독은 사실상 없었다. 관리 공백 속에서 불법 증축과 안전 취약 구조가 장기간 방치됐다.

소방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자체 점검 체계의 한계다. 사측이 직접 지정한 업체가 연 2회 형식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은 실질적인 안전 확보와 거리가 있다. 전년도 10월 점검에서 소화 펌프 압력 미달이 지적되었음에도 화재 발생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고, 스프링클러가 의도적으로 차단된 상태도 사전에 파악되지 않았다. 공공 기관이 독립적으로, 그리고 불시에 점검할 수 있는 체계가 없는 한 이 구조는 반복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불법 증축이 사람을 가뒀다"

이영주 경일대 교수는 "불법 증축은 대피로를 막아 인명 피해를 키우는 주요 원인"이라며 "소방 점검에서 확인이 어렵다면 지자체 차원의 모니터링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희생자 9명이 발견된 2~3층 사이의 복층 휴게 공간은 당초 설계에 없던 임시 구조물이었다. 한 층을 쪼개 만든 이 공간은 창문이 한쪽에만 있어 환기와 탈출이 어려웠고, 피난 동선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다. 불법 증축이 단순한 행정 위반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람의 탈출 경로를 차단하는 치명적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조원철 연세대 교수는 "불법 증축을 몰랐다는 것은 직무 유기"라며 "위험 물질을 다루는 공장이 관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제도 자체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샌드위치 패널 문제, 경고는 이미 있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샌드위치 패널은 내부 스티로폼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철골 구조 특성상 붕괴 위험도 크다"며 "온도가 800도에 이르면 구조물이 녹을 수 있어 수색과 진화 작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처음 듣는 경고가 아님을 강조한다. 2024년 화성 아리셀 배터리 공장 화재에서도 동일한 지적이 제기됐고, 그 이전의 여러 공장 화재에서도 샌드위치 패널의 화재 취약성은 반복적으로 문제가 됐다. 경고가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사건 처리로만 마무리되어 온 패턴이 이번에도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유증기 환경 자체가 화재 확산의 토양이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점화원 관리, 가연성 물질이 많은 환경 등 다양한 화재 확산 요인들이 있어 특정 요소를 지목하기는 어려운 단계지만, 유증기나 기름이 많은 환경도 여러 확산 요인들 중 하나로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공장은 유류·가스·석유계 물질 등 인화점이 낮고 고온에 노출됐을 때 발화 가능성이 큰 자재를 다루는 경우가 많아 화재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말했다. 금속 가공 공장의 환경 자체가 일반 시설과는 다른 차원의 화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 환경에 맞춘 특화 안전 기준은 현행 제도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

"사고 처리로 끝내면 또 반복된다"

조원철 연세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사고가 나면 사건 처리로 끝나고 구조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아리셀 참사와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전문가들의 종합적인 시각을 압축한다. 수사가 시작되고 누군가 처벌받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동안, 제도의 구멍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방청은 화재 직후 전국 금속 가공 사업장 2,865곳을 대상으로 3주간 합동 긴급 안전점검에 나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긴급 점검이 끝난 자리에 항구적인 제도 개선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 점검 역시 의례적 반응에 그치고 만다고 경고한다.

대전시장은 "건축사협회, 전기·소방 관련 협회 등 유관기관과 협업을 통해 연말까지 체계적으로 전 산단을 전수조사하여 제도 개선이 가능한 부분의 종합 계획을 세우고 중앙정부·관계 부처와 협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자체 수장이 공개적으로 현행 제도의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나선 것 자체가, 이번 화재가 드러낸 제도적 공백의 심각성을 방증한다.


에필로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반복된다

정의당은 "이번 참사의 현장에는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할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었다"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소방시설 설치 기준의 즉각 현실화와 노후 산업단지 전반의 소방 안전망 근본 재설계를 요구했다.

이 발언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기술적 진단에 가깝다. 이번 화재에서 드러난 것은 특정 현장의 개별적 문제가 아니다. 3층 이하 공장에 스프링클러를 면제하는 법 기준, 위험물의 물리적 분리를 강제하지 않는 규정, 자체 점검에만 의존하는 소방 설비 관리 체계, 점심시간 대피를 상정하지 않는 훈련 규정, 단일 공급망에 의존하는 산업 구조 — 이 모두가 이번 대형 참사를 가능하게 한 구조적 배경이었다.

화재 안전의 역사는 참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이천 물류창고, 화성 아리셀. 그리고 이번 대전의 화재. 사건이 발생하고, 조사가 이루어지고, 법이 개정되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참사가 발생하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 이 순환을 끊으려면 사고 이후의 대응이 아닌 사고 이전의 설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기술은 이미 충분하다. 의지와 제도가 따라가느냐가 문제다.


2026년 4월 3일 금요일

글로벌 분유 리콜 사태 분석: 공급망이 곧 안전

사태의 시작 — 독소 하나가 글로벌 시장을 흔들다

2026년 초, 영유아 분유 시장에 대규모 충격파가 덮쳤다. 네슬레, 다논, 락탈리스 같은 세계 최대 식품 기업들이 줄줄이 분유를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콜의 직접 원인은 '세레울리드(Cereulide)'라는 독소. 바실러스 세레우스(Bacillus cereus) 박테리아에서 유래된 이 독소는 구토와 메스꺼움뿐 아니라 패혈증, 심각한 간 손상, 뇌농양 등 중증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프랑스 공중보건청은 세레울라이드가 프랑스 집단 식중독 원인의 약 25%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독소 그 자체가 아니라 독소의 경로였다. 분유에는 모유와 비슷한 영양 성분을 구현하기 위해 오메가-6 계열 불포화지방산인 아라키돈산(ARA)이 사용된다. 문제가 된 분유 속 아라키돈산은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 하나의 중국산 원료 공급업체에서 시작된 오염이 여러 국가, 여러 브랜드, 수십 개 제품으로 동시에 번져나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세레울리드가 열에 강해 제조·가공 과정에서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분유 제조사들은 가루 상태의 분유를 기준으로 안전 검사를 시행해 왔는데, 추가 검사를 통해 물과 섞었을 때 독성 농도가 높아지는 것이 발견됐다. 수십 년간 업계 전체가 잘못된 검사 기준 위에서 제품을 출하해 온 셈이다.


리콜의 핵심 원인 — 효율을 추구한 글로벌 공급망의 역습

이번 사태는 단순한 품질 불량 사고가 아니다. 구조적 문제의 폭발이다.

글로벌 식품 기업들은 수십 년간 비용 효율을 최우선으로 공급망을 설계해 왔다. 특정 원료를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는 곳에서 대량 조달하는 방식. 아라키돈산의 경우, 중국의 특정 공급업체 카비오 바이오텍(Cabio Biotech)이 다수 글로벌 기업에 원료를 납품하는 구조였다. 프랑스 아동건강단체인 칠드런스헬스는 카비오 바이오텍을 지목하며, 정부에 이 회사가 생산한 아라키돈산이 함유된 모든 분유를 회수하도록 명령할 것을 요청했다. 카비오 바이오텍은 아라키돈산 오염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나의 공급처가 오염되자, 그 원료를 사용한 모든 브랜드가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 공급망 집중화가 리스크 집중화로 이어진 전형적인 사례다.

대책 측면에서는 세 가지 방향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첫째, 세레울리드에 대한 국제 통일 허용 기준 수립이다. 현재 글로벌 기준에서 세레울리드에 대해 합의된 안전 허용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거나 아예 없는 상태다. 둘째, 완제품 상태뿐 아니라 물에 혼합한 상태에서의 독소 농도를 측정하는 검사 방식 전환이다. 셋째, 핵심 원료의 공급업체 다변화와 리스크 분산으로, 단일 공급처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근본적 해법으로 지목된다.


리콜한 기업들 — 같은 원인, 다른 대응

네슬레는 이번 사태의 트리거 역할을 한 기업이자, 가장 빠르게 움직인 기업이기도 하다. 고도화된 자체 검사 프로토콜을 통해 유럽의 한 생산 시설에서 제조된 일부 배치에서 극미량의 세레울리드 존재 가능성을 업계 최초로 감지했고, 심층 조사 결과 글로벌 업계 공급업체로부터 공급된 특정 아라키돈산 오일의 오염이 원인임을 확인했다. 네슬레가 제공한 정보는 타 제조사들이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문제를 발견하고 리콜을 발표하는 데 11일이 걸렸다는 점에서 늦장 대응 논란도 피하지 못했지만, 업계 최초 발견자로서 정보 공개를 주도한 점은 달리 평가할 부분이다. ARA 오일 공급망은 글로벌 공급업체(중국산 포함)에 의존했고, 리콜은 60개국 이상으로 확대됐다. 자체 내부 품질 기준은 EFSA 가이드라인 기반의 '검출 불가' 수준으로 규제 기준보다 엄격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락탈리스는 피코(Picot) 브랜드 분유를 리콜했다. 락탈리스는 피코 분유 일부 제품을 프랑스뿐 아니라 중국, 호주, 멕시코 등에서 리콜한다고 발표했으며, 리콜은 판매된 18개국에서 모두 진행됐다. 프랑스 농림부 산하 식품총국은 16일에 락탈리스 분유에서 독소가 발견됐다고 인지했고, 리콜 조치 발표까지 5일이 걸렸다. 네슬레와 마찬가지로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중국산 ARA 오일을 조달했으며, 당국의 통보 이후에야 수동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리스크 거버넌스 측면에서 규제 기준 추종형에 가까웠다. 2017년 살모넬라균 분유 사태 당시에도 늑장 대응 논란이 있었던 만큼 소비자 신뢰 회복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논은 압타밀(Aptamil) 등 자사 분유 브랜드를 통해 피해가 확산됐다. 싱가포르 식품청이 다논의 태국산 듀맥스 둘락 1의 예방적 리콜을 명령한 데 이어, 아일랜드 식품안전청도 다논이 아일랜드에서 제조된 특정 배치의 영아용 분유 및 성장기용 분유를 대상으로 리콜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리콜의 원인 역시 중국에서 제조된 ARA 오일 원료가 세레울라이드에 오염됐을 가능성이었다. 다논 역시 당국 명령 이후 이행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으며, 리스크 거버넌스 구조는 락탈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 기업 모두 글로벌 중국산 ARA 오일 공급망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차이는 문제 인지 후 공개까지의 속도, 정보 투명성, 소비자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갈렸다. 네슬레가 선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리콜을 주도했다면, 락탈리스와 다논은 당국의 발표가 나온 뒤에야 리콜에 나서는 수동적 태도를 보였다.


리콜하지 않은 기업 — 힙(HiPP)의 공급망 철학

이번 사태에서 가장 주목받은 브랜드 중 하나가 독일의 유기농 영유아식 기업 힙(HiPP)이다.

힙은 리콜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이다. 힙분유는 유럽 내 6,000개 이상의 유기농 농가와 직접 계약을 맺고 원료를 공급받는 생산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원료 시장에 의존하기보다 유럽 농가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급망을 설계한 구조다. 중국산 ARA 오일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오염 경로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방식은 단기적인 효율성만 놓고 보면 가장 경제적인 모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료 조달 비용이 더 높고, 공급 규모 확장도 제한된다. 그러나 위기 국면에서 이 '비효율'이 최강의 방어막이 됐다. 힙의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급망 설계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리스크 철학의 문제다. 영유아 식품처럼 한 번의 사고가 브랜드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산업에서, 공급망 단순화와 독립성 확보는 보험이자 경쟁력이다.


인사이트 — 이 사태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첫째, 효율성과 안전성은 공존 가능한가. 글로벌 식품 산업은 수십 년간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 왔다. 원료를 가장 저렴하게 공급하는 곳에서 대량 구매하고, 생산을 집중화하며 비용을 낮췄다. 이번 사태는 그 방정식의 이면을 보여줬다. 공급망이 복잡해질수록 특정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가 전체 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커진다. 영유아 분유처럼 신뢰가 핵심인 산업에서는 효율 추구가 곧 잠재 리스크의 누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검사 기준은 충분한가. 분유 완제품(분말) 상태에서는 위험한 수준의 세레울리드가 발견되지 않지만, 추가 검사를 통해 물과 섞었을 때 독성 농도가 높아지는 것이 발견됐다. 기존의 모든 안전 기준이 '가루 상태'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었다는 의미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기준 자체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사태는 정면으로 보여줬다.

셋째, 리콜 자체가 신뢰 자산이 될 수 있는가. 네슬레는 실제 피해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상태에서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먼저 정보를 공개하고, 먼저 리콜을 단행했다. 이번 해외 리콜은 실제 위해 사례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잠재적 가능성에 대비한 예방적 조치였다. 단기적으로는 막대한 비용과 브랜드 타격을 감수해야 했지만, 장기적으로 '문제를 먼저 찾아낸 기업'이라는 서사는 신뢰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반대로, 당국의 통보를 기다렸다가 리콜에 나선 기업들은 '숨기려 했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결국 이번 사태의 핵심 교훈은 하나로 수렴된다. 식품 안전은 제품의 마지막 단계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원료를 어디서, 어떻게 조달하는지, 즉 공급망 설계의 철학이 안전의 출발점이다.


2026년 3월 28일 토요일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 숫자로 보는 제품결함 리스크

미국의 제조물책임 소송 시장 규모는 연간 수백억 달러다. RAND Corporation 추산 기준, 미국 전체 불법행위 소송 비용 중 제조물책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GDP의 약 2%에 육박한다. 그리고 이 비용의 상당 부분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부담한다. 2026년 3월 현재 ClassAction.org에 등재된 제품결함 집단소송 7건은 그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 유아용품: 리콜 발표 = 결함 인지 증거

2025년 11월, ByHeart는 Whole Nutrition 유아용 조제분유에 대한 자발적 리콜을 발표했다. 선제적 조치로 보였지만, 미국 법체계 안에서 이 발표는 곧바로 소송의 탄약이 됐다.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에서 자발적 리콜은 역설적으로 제조사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리콜은 제조사 스스로 결함 존재를 인정한 행위로 해석된다. CPSC(미국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 리콜 데이터에 따르면, 리콜 발표 후 관련 집단소송이 제기되기까지 걸리는 평균 기간은 30일 이내다.

유아용 식품 소송에서 배상 청구액이 다른 제품군보다 높은 이유는 피해자가 영유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법원은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피해자에 대해 제조사의 주의 의무 수준을 최고로 설정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될 경우 실제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이 가능하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미국향 유아·아동용 제품 제조사는 리콜 결정 시점에 소송 대응 프로토콜을 동시 가동해야 한다. ② 리콜은 소비자 안전 절차, 소송 대응은 별개의 법적 프로세스다. 같은 팀이 처리하면 실패한다.


2. 레저·운송 장비: 안전 경고가 면책이 되지 않는다

Malibu Boats는 특정 모델에서 선수 침수로 인해 최소 탑승 인원을 태울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안전 경고를 자사 채널을 통해 공지했다. 이후 제기된 소송에서 이 경고문은 오히려 피고에게 불리한 증거로 활용됐다.

미국 법원은 '경고 결함(Warning Defect)' 이론과 '설계 결함(Design Defect)' 이론을 별도로 판단한다. 경고를 붙였다고 해서 설계 결함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결함을 인지한 상태에서 판매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징벌적 손해배상 요건인 '고의적 무시(Conscious Disregard)'에 해당할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BMW of North America v. Gore, 1996)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실제 손해의 단일 자릿수 배율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시했지만, 실제 하급심에서는 여전히 수배의 배상이 인정되는 사례가 반복된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레저 장비, 선박, 이동수단 수출 기업은 내부 품질 보고서와 소비자 불만 접수 기록을 소송 증거 관점에서 관리해야 한다. ② 결함 인지 후 내부 이메일, 회의록에 남긴 표현 하나가 징벌적 손해배상 근거가 된다.


3. 건자재·설비: 소멸시효가 판매 종료 후에도 흐른다

Mueller 미니 스플릿 라인 세트와 Uponor PEX 배관 소송은 건축 설비 자재의 잠복형 결함(Latent Defect)이 어떤 법적 리스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구리 튜브 미세 균열, PEX 배관 누수 모두 설치 후 수년이 지나 발현된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제조물책임 소멸시효의 기산점은 '피해 발생 시점' 또는 '피해 발견 시점(Discovery Rule)' 중 늦은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 즉 제조사가 해당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10년이 지났더라도, 소비자가 그 시점에 결함을 발견했다면 소송이 가능하다.

미국 내 설치된 PEX 배관 물량은 수천만 미터 단위다. 집단소송으로 묶일 경우 원고단 규모와 배상 총액은 단일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한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건자재·배관·전기 부품·냉난방 설비 수출 기업은 판매 종료 이후에도 소송 리스크를 최소 10~15년 단위로 관리해야 한다. ② 미국향 건설 자재 수출 시 장기 제조물책임보험(Occurrence-based Policy) 설계가 필수다.


4. 디지털 플랫폼: 알고리즘 설계가 '제품 결함'으로 간주된다

로블록스 소송은 디지털 서비스에 제조물책임 이론이 적용되는 최전선 사례다. 원고들의 주장은 플랫폼의 연령 인증 부재, 성인-아동 접촉 차단 실패, 허술한 신고 시스템이 '설계 결함'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온라인 플랫폼의 책임을 제한해온 통신품위법 제230조(Section 230)는 최근 아동 보호 영역에서 적용 예외 논의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2024년 이후 복수의 주에서 아동 온라인 보호법이 시행됐고, 연방 차원의 입법 논의도 가속화됐다. 로블록스 소송은 이 법적 환경 변화와 맞물려 진행 중이다.

소셜미디어 중독 소송은 현재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제품책임 집단소송 중 하나로 발전하고 있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유튜브·틱톡·스냅챗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 건수는 수천 건에 달하며, 주장의 핵심은 무한 스크롤, 변동 보상 알고리즘(Variable Reward Schedule), 수면 시간대 푸시 알림이 의도적으로 설계된 중독 유발 기제라는 것이다. 비디오게임 중독 소송도 동일한 이론적 틀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 기업 리스크 포인트 ① 미국에 앱·게임·소셜 플랫폼을 출시하는 기업은 참여 유도 기능 설계 단계에서 법적 검토를 병행해야 한다. ② 아동·청소년 이용자가 포함된 서비스라면 Section 230 의존 전략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③ 내부 사용자 행동 데이터, A/B 테스트 결과, 중독성 관련 내부 연구가 소송에서 핵심 증거로 제출된다.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의 구조적 특성 5가지

미국 제조물책임 소송은 한국 기업들이 경험한 어떤 법적 환경과도 다르다. 다음 다섯 가지는 반드시 전제로 깔고 있어야 한다.

① 3가지 결함 이론이 동시에 적용된다 설계 결함(Design Defect), 제조 결함(Manufacturing Defect), 경고 결함(Warning Defect)은 각각 독립적인 소송 근거다. 하나를 방어해도 나머지 두 개가 남는다.

② 집단소송(Class Action)은 배상액을 수직으로 올린다 1인 피해액이 $500이어도, 원고단이 10만 명이면 청구액은 5,000만 달러가 된다. 여기에 변호사 비용, 징벌적 손해배상이 더해진다.

③ 내부 문서는 적이 된다 미국 소송의 증거개시(Discovery) 절차에서 이메일, 품질 보고서, 설계 회의록 전부가 상대방에게 제출된다. 결함을 알면서 출시했다는 흔적이 하나라도 나오면 사건의 성격이 바뀐다.

④ 아동 피해는 배상 수준이 다른 카테고리다 유아용품, 아동 플랫폼, 청소년 대상 서비스에서의 피해는 법원이 최고 수준의 주의 의무를 부과한다. 징벌적 손해배상 인정 가능성도 가장 높다.

⑤ 잠복형 결함은 소송 시효가 늦게 시작된다 건자재·설비처럼 결함이 수년 후 드러나는 제품은 판매 종료 후에도 오랫동안 소송 위험 아래 놓인다. 단기 보험과 단기 품질 보증으로 커버되지 않는다.


미국 시장에서 제품을 파는 것은 그 제품의 전체 수명 주기에 걸쳐 법적 책임을 지는 계약에 서명하는 것과 같다. 이 계약의 조건을 사전에 읽지 않은 기업만이 소송을 갑작스럽게 맞는다.


일본, 해외 플랫폼 '국내 관리자 의무화' 본격 시행

정책 도입 배경

일본 경제산업성(METI)이 해외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대한 규제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이번 조치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테무(Temu), 쉬인(SHEIN) 등 중국계 해외 플랫폼의 급성장이다. 이들 플랫폼을 통해 일본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제품이 대거 유입되면서 화재 및 각종 안전사고가 잇달아 발생했고, 이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존 체계에서는 일본에 주소나 영업소를 두지 않은 해외 사업자에게 직접 규제를 적용하기 어려웠다. 국내 수입업자가 있을 경우 해당 업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지만, 소비자가 해외 플랫폼을 통해 직접 구매하는 이른바 '직구(직접구매)' 형태에서는 법적 공백이 생겼다. 이를 메우기 위해 일본 정부는 2024년 6월 소비자제품안전법 및 관련 4개 법률의 개정을 의결했으며, 2025년 12월 25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시행 후 주요 영향

개정법의 핵심은 일본에 거점이 없는 해외 사업자에게 일본 내 관리자(Domestic Administrator) 지정을 의무화한다는 것이다. 적용 대상은 가전제품(전기용품안전법 적용 대상), 가스 기기, 어린이용 장난감 등 PS 마크 부착 대상을 포함한 약 500개 품목에 달한다.

위반 시 제재 수위도 상당하다. 안전 기준 미달 제품에 대해서는 리콜 및 수입 금지 명령이 내려지고, 위반 사업자와 국내 관리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네임 앤 셰임(Name & Shame)' 방식의 공표 조치가 병행된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역시 법을 위반한 제품에 대해 판매 중단 또는 계정 정지 의무를 지게 된다.

이로 인해 시장 전반에 걸쳐 구조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내 관리자 지정 비용과 행정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규모 해외 사업자들은 일본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 압력에 직면했다. 반면 이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규모 있는 기업이나 전문 대행사들에게는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업체들의 대응 방안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이번 규제가 부담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핵심 대응 방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내 관리자(대리인) 조기 확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본 현지에 신뢰할 수 있는 국내 관리자를 선임하는 일이다. 일본 내 법인, 현지 파트너사, 또는 전문 규정 준수(Compliance) 대행사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대행사를 이용할 경우 비용이 발생하지만, 규정 위반으로 인한 플랫폼 퇴출이나 리콜 조치보다는 훨씬 낮은 리스크다.

제품 안전 인증 사전 취득 PS 마크 등 일본 내 안전 인증을 수출 전 단계에서 미리 취득해야 한다. 인증 취득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상품 기획 단계부터 반영하지 않으면, 시장 출시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유통 구조 재검토 직접 판매(D2C) 방식보다 일본 내 현지 유통 파트너 또는 수입업자를 통한 간접 판매 구조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현지 유통사가 국내 관리자 역할을 겸하도록 계약을 구성하면 규정 준수와 유통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플랫폼별 정책 변화 모니터링 아마존 재팬, 라쿠텐 등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은 이번 법 시행에 맞춰 입점 요건을 강화하고 있다. 플랫폼별 정책 업데이트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요구 서류나 인증 요건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입법 동향

일본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2026년 3월, 일정 규모 이상의 해외 플랫폼 사업자에게 국내 대리인 지정을 의무화하고, 소비자 분쟁 발생 시 판매자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테무, 알리익스프레스 등 중국 플랫폼의 급성장으로 유발된 소비자 피해 급증이 배경이다.

이는 글로벌 차원에서 '플랫폼 책임론'이 강화되는 흐름을 반영한다. 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 미국의 각 주 단위 플랫폼 규제 논의와 궤를 같이하며, 아시아권에서도 해외 플랫폼에 대한 역외 적용 규제가 본격화하는 추세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유사한 규제 체계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 대리인 지정 의무화가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을 경우, 이를 사전에 체계화한 기업이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보어스 헤드 리스테리아 사태: 120년 브랜드가 무너진 방식

보어스 헤드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집단소송 최종 승인 심리는 2025년 8월로 예정돼 있고, 추가 소송이 계속 진행 중이다. 120년 브랜드가 한 공장의 만성적 위생 실패로 뒤집어진 이 사례는, 식품 안전이 얼마나 무겁고 회복하기 어려운 가치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과 경위

2024년 5월 29일, 미국 여러 주에서 리스테리아증(Listeriosis) 환자가 산발적으로 신고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식중독으로 보였지만, 역학조사를 거듭할수록 하나의 식품 브랜드로 화살표가 향했다. 미국 델리 미트(가공육) 시장의 프리미엄 브랜드, 보어스 헤드(Boar's Head)였다.

조사의 단초를 제공한 건 메릴랜드주 보건부였다. 연구진이 볼티모어 한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보어스 헤드의 리버부어스트(간 소시지)를 검사한 결과,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게네스(Listeria monocytogenes) 오염이 확인됐다. 이 균주는 당시 유행 중이던 리스테리아 집단감염의 원인균과 일치했다.

미 농무부(USDA) 식품안전검사청(FSIS)은 2024년 7월 12일 공식 조사에 착수했고, 역학·실험실·추적 조사 모두 버지니아주 자렛(Jarratt)에 위치한 보어스 헤드 공장을 오염원으로 지목했다.


리콜 규모와 피해 현황

2024년 7월 30일, 보어스 헤드는 자렛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700만 파운드(약 3,175톤) 이상을 전량 리콜했다. 최초에는 리버부어스트 약 20만 파운드로 시작했으나, 나흘 만에 71개 제품군으로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최종 집계 기준으로 미국 19개 주에서 총 61명이 감염됐고, 그 중 60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다. 사망자는 일리노이, 뉴저지, 뉴욕(2명), 버지니아, 플로리다, 테네시, 뉴멕시코, 사우스캐롤라이나(2명) 등 10명에 달했다.

이 사태는 2011년 캔탈루프 리스테리아 사건 이후 13년 만에 미국 최대 규모의 리스테리아 집단감염으로 기록됐다. 발병이 공식 종료된 것은 2024년 11월이었다.

리콜 대상 제품의 일부는 해외에도 유통됐다. 수출 대상국은 케이맨 제도,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파나마였다. 미국 외 국가에서의 대규모 추가 리콜은 보고되지 않았으나, 해당 국가들은 즉각 해당 제품의 유통을 중단시켰다.


보어스 헤드는 어떤 회사인가

보어스 헤드는 1905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설립된 가공육 전문 기업으로, 현재 본사는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에 있다. 주식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으며, 창업자 후손들이 지분을 폐쇄적으로 보유하는 비상장 가족 기업이다.

창업 이후 120년간 "최고의 품질"을 슬로건으로 내걸어 왔으며, 500여 종에 달하는 제품군을 보유한 미국 최대 프리미엄 델리 미트·치즈 기업으로 성장했다. 슬로건은 "Compromise elsewhere(타협은 다른 곳에서)"였다. 매출 추정액은 연간 30억 달러(약 4조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과 달리, 내부는 극히 폐쇄적이었다. 2022년 법원 진술에서 20년 경력의 CFO 스티브 쿠렐라코스(Steve Kourelakos)는 자사 CEO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결정은 사실상 프랭크 브런크호스트(Frank Brunckhorst)와 소수 경영진에게 집중돼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구조적 위생 실패

이번 사태는 우연한 오염이 아니었다. 수년에 걸친 만성적인 내부 부패의 결과였다.

USDA 조사관들은 2023년 8월부터 2024년 8월 사이 자렛 공장에서 무려 69건의 위반 사항을 기록했다. 조사관들이 목격한 내용은 검은 곰팡이, 밀듀, 바닥에 고인 혈액, 기계 위의 육류 잔재물, 악취 등이었다.

오염 징후는 더 일찍 감지됐다. 사태 발생 2년 전에 이미 조사관들은 자렛 공장이 "중대한 결함"을 보이며 식품 안전에 "임박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었다. 당시 지적된 문제는 녹슨 장비, 바닥에 응결되는 습기, 벽면에 자라는 녹색 곰팡이 등이었다.

USDA 보고서는 공장 내 "전날 생산 잔재물이 포장 장비를 포함한 곳곳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노출된 식품 위에 응결수가 떨어지는 상황과 수분이 고일 수 있는 균열·구멍·파손된 바닥재도 발견됐다.

이 공장은 연방 검사관이 아닌 버지니아주 공중보건 담당관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 역시 문제의 한 축으로 지목됐다. 전문가들은 규제 당국이 이 수준의 위반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공장 가동을 허용한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경영진의 책임과 제재

2024년 7월 31일, FSIS는 자렛 공장의 모든 생산 활동을 즉시 중단시켰다. 보어스 헤드는 같은 해 9월, 자렛 공장의 영구 폐쇄와 리버부어스트 제품 생산의 전면 중단을 공식 발표했다.

법적 대응도 뒤따랐다. 2024년 9월 3일, 사망한 88세 남성의 유족이 보어스 헤드를 상대로 불법 사망(wrongful death)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후 적어도 7건 이상의 소송이 추가로 제기됐다.

집단소송(class action)과 관련해서는, 보어스 헤드가 리콜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310만 달러(약 42억 원) 규모의 집단소송 합의에 응했다.

그러나 경영진 개인에 대한 형사 책임 추궁이나 고위 임원의 공개적인 사임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회사가 오랜 기간 유지해 온 폐쇄적 지배구조가 책임의 투명한 귀속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태 수습 과정에서 보어스 헤드는 2025년 5월 식품 안전 최고책임자(Chief Food Safety Officer)인 나탈리 다이엔슨(Natalie Dyenson)을 처음으로 임명하고, 프랭크 야니스(Frank Yiannas)가 이끄는 식품 안전 자문위원회를 신설했다. 또한 기존의 가장 약한 수준의 리스테리아 규칙 통제 방식에서 더 엄격한 기준으로 상향 전환했다.

자렛 공장은 1년여의 폐쇄 끝에 2026년 초 재가동에 들어갔다.


한국 식품업계에 주는 메시지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외 식품 사고로 읽고 넘길 일이 아니다.

첫째, 브랜드 명성은 위생 앞에서 무력하다. 보어스 헤드는 120년 업력을 자랑하는 프리미엄 브랜드였다. "타협은 다른 곳에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가장 먼저 타협한 곳은 공장 위생이었다. 한국의 식품 기업들도 브랜드 투자 못지않게 현장 위생 관리에 동등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위반 사항의 누적을 방치하면 반드시 터진다. 자렛 공장은 2년 전부터 경고를 받았다. 69건의 위반 기록이 쌓이는 동안 아무도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 식품 공장에서도 HACCP 점검이나 내부 감사에서 반복 지적되는 항목들이 '관행'으로 묵인되는 사례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셋째, 폐쇄적 지배구조는 식품 안전 거버넌스의 적이다. 보어스 헤드의 CFO가 자사 CEO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사실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의사결정 구조가 불투명할수록 위기 대응도 느리고, 책임의 귀속도 흐릿해진다. 오너 중심의 폐쇄적 경영 구조가 흔한 한국 중소 식품기업들에게도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경고다.

넷째, 최고식품안전책임자(CFSO)의 독립적 권한이 필요하다. 보어스 헤드는 이번 사태 이후에야 처음으로 CFSO를 임명했다. 식품 안전 담당자가 사고 발생 전부터 이사회 수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면, 현장 경고 신호는 번번이 묻힌다.

다섯째, 리콜 대응은 속도와 범위가 전부다. 보어스 헤드는 최초 리콜 규모를 과소 책정했다가 나흘 만에 35배 이상 확대했다. 이 지연이 추가 피해를 낳았다. 리콜은 '충분히'보다는 '빠르게, 넓게'가 원칙이다.


2026년 3월 7일 토요일

스타벅스, 뉴욕시 역대 최대 노동법 합의금 3,890만 달러

직원 1만 5,000명 이상의 근무 스케줄을 임의로 삭감하고 추가 근무 기회를 박탈한 사실이 적발되며, 뉴욕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 보호 합의금 지급이 확정되었다. 단순한 법규 위반을 넘어, 이 사건은 글로벌 프랜차이즈 기업이 수익 압박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발표일: 2025년 12월 1일 발표 기관: 뉴욕시 소비자·노동자보호부(DCWP)


위반 법률: 공정근무주간법

스타벅스가 위반한 것은 뉴욕시의 공정근무주간법(Fair Workweek Law)이다. 2017년 시행된 이 법은 패스트푸드 업종의 구조적 약자인 시간제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고용주에게는 근무 14일 전 정기 스케줄 사전 고지, 스케줄 변경 시 프리미엄 수당 지급, 신규 채용 전 기존 직원에게 추가 근무 기회 우선 부여 등의 의무가 부과된다.

이 법의 핵심은 단순한 임금 보호가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스케줄이 초래하는 삶의 불안정성, 즉 육아 공백, 학업 중단, 부업 계획의 붕괴를 방지하는 데 있다. 뉴욕시가 이 법을 도입한 배경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들이 노동 유연성을 명분으로 사실상 직원의 생활 전반을 통제해왔다는 오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위반의 실체: 구조적이고 광범위한 착취

조사 결과 드러난 위반은 일부 매장의 일탈이 아니라, 뉴욕시 전역 300개 이상 매장에 걸친 조직적 관행이었다. 2021년부터 2024년 사이에만 50만 건 이상의 위반이 확인되었다.

구체적 위반 양상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정기 스케줄 없이 운영되었으며, 회사는 직원 동의 없이 근무시간을 15% 이상 삭감하였다. 이로 인해 직원들은 주간 소득을 예측할 수 없었고, 일상적 계획조차 세우기 어려운 상태에 지속적으로 놓였다. 또한 회사는 기존 직원에게 추가 근무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채 신규 직원을 채용함으로써, 다수를 비자발적 파트타임 상태에 묶어두었다. 이는 인건비를 최소화하면서도 필요 인력을 확보하는 전형적인 비용 절감 기제였다.


사건 경위

2022년, 수십 건의 노동자 민원이 접수되며 DCWP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일부 매장에 국한되었던 조사는 이후 뉴욕시 내 전 매장으로 확대되었다. 단일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전반의 운영 방식 자체가 문제임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5년 12월 1일, 뉴욕시장 에릭 애덤스와 DCWP는 총 3,890만 달러 규모의 합의를 공식 발표하였다. 피해 직원 보상금 3,550만 달러와 민사 과태료 340만 달러로 구성된 이 합의는, 뉴욕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 보호 합의로 기록되었다. 보상은 해당 기간 근무한 직원에게 주당 50달러씩 지급되며, 약 1년 반을 근무한 직원은 3,900달러가량을 수령하게 된다. 금전 보상과 함께, 최근 매장 폐점으로 해고된 직원들에게는 타 지점 재취업 기회가 보장되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나: 경영 환경과 구조적 배경

이 사건을 단순히 법 위반 기업의 도덕적 해이로 읽는 것은 표면적 해석에 머무는 것이다. 위반이 이토록 광범위하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스타벅스가 처한 경영 환경과 그 안에서 작동한 구조적 유인이 있었다.

스타벅스는 팬데믹 이후 급격한 비용 증가와 수익성 압박에 직면하였다. 원자재 가격 상승, 임금 인플레이션, 글로벌 소비 침체가 겹치며 영업이익률을 지키기 위한 내부 압력이 강해졌다. 이 압력이 가장 먼저, 가장 손쉽게 작용하는 곳은 현장 인력의 스케줄 관리였다. 정규 근무시간을 보장하는 것보다 필요에 따라 인력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단기 비용 절감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타벅스의 분권화된 매장 운영 구조도 위반을 용이하게 한 요인이었다. 수백 개의 뉴욕시 매장은 각 지역 관리자의 재량 아래 스케줄이 운영되었고, 본사 차원의 법적 컴플라이언스 감시 체계가 이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법을 준수하는 비용보다 위반이 적발될 가능성과 그에 따른 제재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되는 구조에서, 현장의 관행은 자연스럽게 법의 경계를 넘어섰다.

여기에 더해, 공정근무주간법 자체의 집행력 문제도 있었다. 이 법이 시행된 이후로도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들의 위반 사례는 지속적으로 보고되었으나, 3,890만 달러라는 전례 없는 규모의 합의가 나오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기업 입장에서는 적발 이전까지 수백만 달러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었던 셈이다.


평판 리스크와 브랜드의 역설

이번 합의는 금전적 손실을 넘어 브랜드 신뢰도에 근본적인 균열을 초래하였다. 스타벅스는 오랫동안 직원을 '파트너(Partner)'로 호칭하며 인간 중심의 기업 문화를 표방해왔다. 직원 복지와 공정한 처우를 마케팅의 핵심 서사로 삼아온 기업이, 정작 수만 명의 직원 스케줄을 수년간 불법으로 조작해왔다는 사실은 그 서사 전체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소비자 신뢰는 제품이나 서비스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특히 스타벅스처럼 '가치 소비'를 지향하는 고객층을 주요 기반으로 삼는 브랜드에게, 노동 착취 이미지는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남긴다. 이미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과 잇따른 매장 폐점으로 내부 갈등이 표면화된 상황에서, 이번 사건은 조직 내 신뢰 회복의 과제를 한층 무겁게 만들었다.


시사점: 법적 환경의 변화와 기업의 선택

이 사건은 미국 전역 고용주들에게 예측적 스케줄링 법률 준수의 중요성을 경고하는 강력한 선례로 남게 되었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 유사 법률을 운용하는 도시들의 집행 강화가 예상되며, 노동자 권리 보호를 둘러싼 법적 환경은 한층 엄격해질 전망이다.

단기적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법의 경계를 묵인하는 관행이 결국 훨씬 큰 재정적·평판적 대가로 돌아온다는 것, 이번 스타벅스 사건이 남기는 가장 분명한 교훈이다. 컴플라이언스는 비용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핵심이라는 인식 전환이,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출처: 뉴욕시 DCWP 공식 발표 (2025.12.01) · OPB · Restaurant Dive · Akerman LLP